뜨끈하다
관식이 전에 용식이가 있었다. 단지 '동백꽃 필무렵'에서는 연쇄살인범 '까불이'를 잡으려는 스릴러적 서사가 덧대어져 용식의 순애보가 좀 가려졌을 뿐이다.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로맨스가 조금 더 잘 보인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전생애에 걸쳐. 관식과 애순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자식이 자식을 낳으며 일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피고 지는 인생을 조명한다. 희로애락, 흥망성쇠 모든 게 들어있다. 요즘 보기 드문 16부작이라는 스케일 속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사계절에 빗대어. 단순한 로맨스물도 아니요, 가족물도 아니다. 절제된 대사 속 뜨끈한 인간미가 넘친다.
짝꿍이 말했다
순애보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인다고. 정말 그랬다. 커다란 사랑은 때로는 무모함, 때로는 용기의 장작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만으로는 극복이 안 되는 현실의 장벽도 있다. 돌고 돌아, 관식의 사랑은 충섭에게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들의 태도가 사뭇 대조적이다. 관식과 애순의 대단한 장녀 금명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오랜 연인 영범이 있다. 둘은 깊이 사랑하지만, 영범 모는 일관되게 금명과 금명의 가족을 무시한다. 연애 시절에서부터 상견례장, 그리고 혼주 한복을 맞추는 어머니끼리의 만남에서까지. 반면, 충섭 모는 처음부터 금명을 예뻐한다. 예뻐하기 이전에 존중하고 배려한다. 예의가 있다. 나이가 한참 아래여도 말을 놓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챙겨주는 식이다. 무명 화가인 아들의 극장 그림마다 귀하게 바라봐주고, 묵묵히 애정을 듬뿍 주는 엄마로서의 모습은 금명을 대하는 애순, 관식의 부모로서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어디 그 뿐인가. 어린 금명의 총기와 글짓기 능력을 어여삐 여기는 애순 엄마 점례의 모습과도 결이 비슷하다.
굳세어라 애순아
애순의 가정 환경은 독특하다 못해 복잡하고 불우한 면이 있다. 재능을 가졌으되 펼치지 못했다. 엄마를 가졌으되 같이 살지 못했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되,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했다. 새 아빠가 있었으되 그마저 재혼하며 떠나는 바람에 새아빠도, 배다른 동생들도 모두 멀어졌다. 오갈곳 없는 애순의 곁에는 그 어린 시절부터 애순만 바라보는 관식이 있었다. 학씨 아저씨(사실은 부씨다)처럼 애순을 좋아한 다른 남성도 있었지만은.
하지만, 애순의 곁에는 품 넓은 어른들이 있었다. 평생을 친정 노릇해준 해녀 이모들, 만삭의 몸으로 떨어진 쌀 걱정에 금명이 맘 다칠까 딱 하루치씩만 쌀을 채워준 주인집 노부부 등. 주위의 보살핌으로 삶의 고비마다 따스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애순과 관식. 그들 역시 없는 살림에도, 살림이 펴서도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돕는다. 이래저래 이들 부부, 이들 가족은 응원할 수밖에 없다. 왜? '착한 끝'을 봐야겠으니까.
나머지
허투루 등장한 장면이 단 하나도 없다. 모든 떡밥을 끈질기게 회수한다. 이걸 이렇게 연결짓는다고?라고 감탄할 수밖에. 마지막 반지 떡밥은 상상을 초월한다. 철용이는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정숙이랑 한음이는 가족사진으로나마 등장했지만. 영범의 결혼상대는 누구였을까. 게다가 뻔한 인물도 별로 없다. 조연들마저 입체적이어서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모두의 연기가 좋았지만, 특히 충섭 역의 김선호 님, 애순 시어머니 역의 오민애 님의 연기가 내게는 장면 장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김선호는 단언컨대 이 작품의 히든카드다. 조만간 다시 한 번 정주행하고 싶다. 손수건 꽤나 적셨는데도 말이다. 다만, 엄마랑은 차마 같이 못 볼 것 같다. 흑흑.
이미지: 넷플릭스 공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