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이 던지는 언어의 철학
사라져 가는 언어의 슬픔 속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은 곧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일이다.
손자에게 읽어주기 위해 그림책 한 권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조금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냥 읽어주었다.
제목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이었다. 그림책 안에는 서로 다른 인종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건 인간의 얼굴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처음엔 아이에게 읽어주기 위한 책이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나 자신이 오래 머물러 여러 번 읽게 되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장난감보다 강아지보다 여러분이 아는 그 누구보다 오래전부터 요."
'나'는 바로 언어였다. 언어가 스스로를 소개하며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형식이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명
이 그림책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또 다른 책이 있다. 30년 동안 아마존 오지에서 '파다한' 부족의 언어와 삶을 연구한 다니엘 에버렛의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다.
파다한의 언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말과는 전혀 달랐다. 소리뿐 아니라 콧노래의 언어, 휘파람의 언어, 외침의 언어, 몸짓의 언어 등 다양한 형태로 의미를 전달했다.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는 영어로 'Good night!'이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아마존에서 파다한 사람들은 곤히 잠들 수가 없다. 그들만의 어떤 방식으로 '잘 자!'라는 인사말의 뜻을 저렇게 전하는 것, 그들의 언어인 것이다.
아프리카의 북소리 언어, 까나리아 제도의 휘파람 언어처럼 그들 특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 책을 읽으며 나는 언어가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삶을 이어주는 리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그림책,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를 통해 그 생각이 다시 깊어졌다. 책에서 언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인간처럼 숨 쉬고 생각한다고, 때로 아기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겨울의 칼바람처럼 날카롭다'라고. '사랑을 품기도 하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면서,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묘사된다.
여러분은 아기였을 때 나를 잘 몰랐어요. 시간이 가면서 점점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나를 서서히 잊어버리기 시작할 거예요.
언어는 생명처럼, 우리가 잊을수록 더 멀어지고 돌아보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휴대폰 세대의 언어 상실
책 속 한 장면에는 사람들이 모두 휴대폰을 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림이 나온다.
그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날 멀리해요. 그래도 머릿속에서 밀어내지는 못할걸요?"
나는 그 장면에서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짧은 문자와 단축형 말로만 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언어는 점점 그 본래의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요즘 젊은 세대가 만들어내는 줄임말과 신조어를 보면 언어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실감한다.
"어른이 될 무렵엔 너무 많이 사라졌을 거예요."
이 문장은 단지 옛말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깊이와 온기가 희미해져 가는 세상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언어가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이유
"나는 여러분을 인간답게 만들어요. 나는 언어랍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언어가 무어냐고 묻는 손자에게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었다.
언어는 인간의 지능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잇는 다리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알고 있다. 책에 쓰여 있는 글과 우리가 함께 나누는 말이 언어라는 것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생각했다. 언어를 제대로 가르치는 일은 곧 마음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올바른 말을 배우고, 따뜻한 말을 쓰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책 속 언어가 말하듯, '나는 사랑을 보여줄 수도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작가, 빅터 D.O. 산토스의 말에 따르면 '2100년이면 지금 존재하는 7,168개의 언어 중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언어 하나가 소멸되면 문화 하나도 사라집니다.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꽃피운 문화, 지리, 식물, 철학, 지식이 함께 영원히 사라집니다.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 그림책은 단지 언어를 주제로 한 책이 아닐 것이다. 언어를 찬미하는 시이자, 인류의 문화유산을 지키자는 선언문이다.
언어는 우리의 얼굴이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 듣는 태도, 쓰는 말속에는 한 사람의 품격과 세대의 역사, 그리고 문화의 향기가 스며 있다. 언어가 사라지면 인간의 기억도 사라진다. 하지만 언어가 살아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이렇게 다짐한다.
"책이 존재하는 한, 언어는 살아 있을 거야. 그리고 언어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책을 많이 읽고, 읽어주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