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달의 그림책 <메리>
설날 아침, 떡국 냄새가 부엌을 감싸던 기억이 있다.
떡국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어머니는 국물을 떠보며 맛을 본다. 할머니는 손수 빚은 만두를 그릇에 담고, 우리들은 새 옷의 빳빳한 옷깃을 만지작거린다.
그때는 몰랐다. 그 풍경이 얼마나 귀하고 따뜻한 것이었는지를.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흩어져 사는 가족들, 그 자리를 대신 채워주는 건 오래된 추억과 한 권의 그림책이다.
안녕달의 그림책 『메리』는 바로 그 잃어버린 ‘정겨움’을 다시 불러낸다.
책의 첫 장면, 새해 아침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의 모습은 마치 우리 모두의 지난 세월 속 한 장면처럼 다정하다.
떡국을 먹으며, 할아버지는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자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말에 아빠는 어디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온다. 그렇게 한 마리의 강아지가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오고 할머니는 그 강아지를 ‘메리’라고 부른다.
이전에 있던 개도 메리, 그전에도 메리였다. 이름은 바뀌지 않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늙어간다.
그리고 메리는 자라서 큰 개가 된다.
사라짐을 통해 남겨짐을 말하다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은 언제나 ‘조용한 이야기’ 속에서 마음을 울린다. 장면의 여백이 넓으며, 대화는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침묵의 여백 안에는 세월의 무게와 관계의 온기가 스며 있다.
『메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에는 큰 사건이 없다. 누군가 떠나고, 또 누군가 남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할머니만 남은 시골집에 도시의 자손들도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잠시 다녀간다. 결국 메리와 할머니만 남아 담담히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정(情)을 나누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단순한 흐름 안에서 작가는 묻는다.
“함께 산다는 건 무엇일까. 기억된다는 건 어떤 일일까.”
안녕달의 문체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감정의 결을 가지고 있다. 그림의 색감도 차분하고 따뜻하다. 그는 유머나 감정의 과장을 피하고, 대신 소리 없는 공감을 택한다. 그래서 독자는 읽는 동안 눈물이 나기보다 마음이 천천히 젖어든다.
『메리』는 그런 작가의 미학이 완숙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말보다 긴 사랑의 언어, “가끔은 데리고 놀러 와”
할머니와 메리가 함께 밥을 먹고, 마당을 거닐고, 밤이 깊어가는 장면들 속엔 세월의 흐름이 잔잔히 깃들어 있다. 메리는 짖지 않고, 울지도 않는다. 마치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듯이. 그 고요함 속엔 오랜 시간 쌓인 믿음과 사랑이 스며 있다.
시간이 흘러 메리는 새끼를 낳는다. 할머니는 새끼들을 이웃들에게 한 마리씩 보내게 된다.
동네 춘자 할머니, 슈퍼집 할아버지, 모두 오래 알고 지내온 얼굴들이다. 어느 날 배달을 온 슈퍼집 할아버지에게 새끼를 건네며 할머니는 말한다.
“가끔 데리고 놀러도 오고, 야도 지 엄마 봐야제"
이 짧은 말속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스며 있다. 그것은 인사가 아니라, 헤어짐을 아는 사랑의 언어다. 할머니는 새끼를 떠나보내는 어미 개의 마음과 어미의 품을 그리워할 새끼의 빈자리를 안다.
짖지 않고, 말하지 못하지만, 분명 서로 그리워할 것이다. 할머니가 건네는 이 한마디에는 이웃과의 정, 생명에 대한 배려, 그리고 관계를 이어가려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은 안녕달 작가의 주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떠나는 존재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이별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온순한 사랑의 철학.
메리의 이름 속에 살아 있는 시간의 온기
메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하나의 가족에서 이웃으로, 마을로 번져간다. 생명은 이어지고, 정은 흩어지지 않는다. 시골 마을의 밥 냄새처럼, 말보다 더 오래 남는 따뜻한 온기다.
그래서 『메리』는 이웃집 ‘강아지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삶과 죽음을 잇는 이야기다.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할 때, 완전히 끊어내는 대신 “가끔은 놀러 와”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이 책이 전하는 진짜 사랑이다.
메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세상이 변해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여전히 조용히 꼬리를 흔들고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이 가진 온기처럼.
그림책 『메리』는 최근 다시금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세대의 온기’를 이야기하게 하는 작품이다.
설날의 풍경,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한 마리 강아지를 통해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을 그린 이 책은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잊히기 쉬운 가족과 이웃의 정을 되살려준다. 작가는 일상 속 평범한 장면들로, 누구에게나 있었던 따뜻한 시간의 기억을 소환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