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스콧 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아침마다 말을 잃어버린 채 깨어나는 아이가 있다. 소나무 가지가 혀에 엉겨 붙고, 까마귀가 목구멍을 틀어쥐며, 달빛이 입술을 지워버리는 듯한 시간.
조던 스콧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는 말을 더듬는 한 소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고요한 격랑을, 시처럼 섬세하고 찬찬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캐나다 시인 조던 스콧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기에 한 문장, 한 이미지가 모두 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소년은 아침마다 낱말의 소리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그 낱말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학교에서 발표해야 하는 순간이면 얼굴은 굳고 주변은 흔들린다. 아이들은 그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듣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입술만을 바라본다. 시드니 스미스의 그림 속에서 그 순간의 불안은 형태를 잃고 번져 나간다. 소년의 존재는 돌멩이처럼 고요해진다.
나를 드러내는 일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운가, 누구나 한 번쯤 겪어온 그 막막함이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린다. 어릴 적 내 짝꿍도 말을 더듬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정작 나는 누가 말을 시킬까 봐 눈 마주치기를 싫어했다. 어릴 적 그런 내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없어졌다.
어떠한 계기가 있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조금 대담해졌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나는 앞에 나서서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독서량, 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책 속에서 이리 저리 흘러 다니며 부딪혔던 내가 어른이 된 것이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는 작가, 조던 스콧의 어릴 적 이야기라는 것을 그의 편지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발표 시간, 소년의 입술은 꼼짝도 안 한다. 발표를 망치고 절망으로 얼어붙은 그 날, 아버지는 소년을 강가로 데려간다. 강물은 물거품을 일으키고, 소용돌이치고, 바위에 부딪히며 흐른다. 그 거칠고도 아름다운 움직임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말한다.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이 한마디의 말은 소년의 세계를 조용히 뒤집는다. 더듬거림이 강물의 리듬으로 재해석된다. 말이라는 것은 고르게 흘러야 한다는 믿음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강물이 곧고 아름답게만 흐르지 않듯, 소년의 말 또한 자신만의 결을 가진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임을 깨닫는다.
그 자리에서 소년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두려움과 조롱의 기억을 조금씩 벗겨낸다. 그리고 소년은 발표 시간에 그 강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그 강이라고. 조던 스콧의 아버지가 그러했으리라 짐작된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철학을 짐작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햇빛 아래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에서 그림의 색채는 이전과 다르게 환하게 빛난다. 억눌렸던 마음이 비로소 스스로를 긍정하는 순간, 세상은 선명해지고 맑아지는 것이다. 스미스의 수채화는 내면의 변화가 어떻게 세상의 빛을 바꾸는지를 어둡지만 예민하게 보여준다.
이 그림책은 말을 더듬는 아이의 이야기에서 나아가, 불완전함을 결함이 아닌 고유한 리듬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시인의 찬가다. 주저함, 떨림, 고립감.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때 붙잡혀 있던 감정들. 작품은 그것들을 부끄러움으로 다루지 않고, 흐르기 위해 필요한 물살로 다룬다.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려요.
그러면 울음을 삼킬 수 있거든요.
'나는 강물처럼 말한다.'
나 자신을 끌어안는 선언
이 문장은 이제 두려움 앞에서 내미는 변명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끌어안는 선언이 된다. 흐름의 모양은 다르지만, 모든 말은 결국 자신만의 물결을 향해 나아간다는 진실을 일깨우며. 책을 덮고 나면 한동안 강의 물빛이 마음속에 남는다. 언제부턴가 굳어버린 듯했던 내 안의 물살이 다시 조금씩 흔들리는 기분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목소리도 어쩌면 그렇게, 잔잔하게 혹은 거칠게, 여전히 흐르고 있었음을 이 책은 알려준다.
이 그림책의 작가인 조던 스콧은 실제로 책의 마지막 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을 더듬는 건 두려움이 따르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일이에요. 물론 나도 가끔은 아무 걱정 없이 말하고 싶어요. 우아하게, 세련되게, 당신이 유창하다고 느끼는 그런 방식으로요. 그러나 그건 내가 아니에요.
나는 강물처럼 말하는 사람이에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용기, 그래서 내면의 강물을 만나 자연스레 흐르는 작가의 이야기,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는 침묵 속에 숨어 있던 자기 긍정의 순간을 밝혀주는 아름다운 그림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