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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 Nov 17. 2019

워라밸이 완벽한 나라.

나 혼자만 조급한 건 어쩔 수 없다


World Economic Forum 2019


네덜란드 직장인의 삶은 아주 이상적이다. 네덜란드의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하니 말 다했다. (한국은 40개 국가 중에 37위다.)


우리나라에서도 워라밸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삶과 일의 균형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평가를 하는 건지 좀 더 찾아보았다.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평가하는 지표 중 첫 번째는 업무 시간의 양이다. 보통 풀타임으로 일하면 주당 38-40시간 근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0.4%의 근로자들이 50시간 이상 근무를 한다. OECD 평균 11%에 비해 매우 적은 수치다.  


업무 시간이 길다는 것의 의미는 스트레스와 개인 건강에도 무리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업무 외 시간 - 가족과 여가에 보내는 시간- 이 적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수치로 보이는 시간의 양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의 질, 그리고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적절한 휴식과 개인의 발전을 위한 활동에도 제한이 걸린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일을 하는 건데, 일을 많이 하게 되면 내 삶의 균형이 무너진다. 서글픈 현실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운이 좋은 소수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내게 일은 참 중요하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아예 안 하느니 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일에 우선순위를 두다 보니 나는 늘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에 와서 처음에는 당황했던 것 같다. 나 혼자 (그리고 다른 유학생들까지도)만 안달복달하면서 잘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여유 있는 태도가 게으르거나 진지하지 않아 보인다고 속단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해보니 내가 속한 이 곳의 문화적 배경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 붙잡고 더 조급해하며 노력한다고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학습했다. 물론 이 곳의 단점도 있지만, 이런 요소들이 모여 워라밸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개인적으로 깊게 공감한 몇 가지와 내 경험을 적어본다면;


1. 각자 다른 가치관이 용납되는 문화.

사람마다 우선순위가 다르다. 여기는 워라밸 1등 국가니까 가족이 1순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추구하는 가치와 여가 생활이 다르고 그것이 용납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고등학생은 공부를 성실하게 해야 하고, 대학생은 취업을 해야 하고, 직장인은 회사에 충성해야 한다면. 여기는 누가 뭘 추구하던 뭘 하던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주어지는 느낌이다. 


2. 서로에 대한 믿음과 유연한 사고.

처음 리서처로 일을 시작했을 때 누구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처음엔 대기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팅에 몇 번 불러 참여하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의 상사인 교수님에게 뭘 해야 하냐고 물어봤는데, 교수님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업무 기술서를 나보고 쓰라고 했다. 그래서 이거 저거 준비를 해서 가져갔다. 그랬더니 그렇게 하라고만 할 뿐 몇 가지 조언 외에는 별 말이 없었다. 내가 이 주어진 틀 안에서 어떻게 일을 하고 어떤 성과를 내는지는 나의 선택이자 책임이었다. 내가 선택하면 내가 그만큼 노력하면 된다. 여기서는 일부 금융권 등을 제외하고는 출퇴근 시간이 매우 자유롭다. 재택근무도 일상이고 업무 시간 중 병원이나 은행과 같은 개인적인 볼일을 보는 것도 제약이 거의 없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미팅 시간이나 데드라인만 엄수하면 된다. 한국에서도 근 몇 년간 유연근무제 등을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뭔가 이 곳과는 다른 느낌인데.. 그 이유는 근로자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 내 일만 잘하면 내가 어떻게 주당 40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해 누구의 눈치도 볼 일이 없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물론 잘해야 한다. 내가 약속한 성과를 내야 한다. 자유도가 주어져도 일을 잘 해낼 거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유연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뭘 떠먹여 주거나 등 떠밀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따라오는 부담도 큰 건 사실이다..)


3. 실수해도 괜찮은 문화.

처음에 여기서 공부하며 일하며 어려웠던 점 중에 하나는 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중간 과정이나 결과물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디자인이라는 분야 특성상 같이 일하는 팀원들과 서로 피드백을 공유하며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나 스스로가 자신 없는 것은 남들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다. 여기서는 뭐가 됐던 스스럼없이 공유한다. 아직 아이디어만 있던, 뭘 해봤는데 정말 아니었거나 상관없다. 정말 이건 아니라는 피드백이 나와도, 본인도 타격을 느끼지 않는다. 처음엔 여기 학생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 같고 실속 없어 보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시행착오에 대한 부담이 덜하다는 것은 실수에 대한 포용이 크다는 뜻이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아니어도, 이 학교나 이 회사가 아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없다. 여기가 아니면 다른 데 가면 된다. 그 개인의 탓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내게는) 가벼워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가벼움 덕분에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시도하고 시행착오도 겪고, 결국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 



4. 그리고 그 속에서 혼자 조급해하는 나..

워라밸은 참 좋다. 판은 다 깔려있다. 하지만 일의 양이 적은 것은 아니다. 만약 할 일이 많은데, 주어진 시간 내에 다 하지 못하면 고스란히 내 몫인 것은 똑같다. 같이 지고 갈 사람이 없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손해, 내 능력의 부족이다. 그래서 바깥에서 보면 너무 여유로운데 마음속은 왠지 불안하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다. 작업 공간을 바꿔보기도 하고, 저녁에 일을 해보기도 하고, 일들을 바꿔가며 하기도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는데. 진로에 대한 고민만 머리 싸매고 하고 삶에 대한 대한 고민을 많이 안 해봐서 인 듯하다.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여가 시간이 생기면 뭘 하고 싶은지 내 가치관이 강하게 서있지 않다. 그래서 내버려 두면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뒤늦은 숙제처럼 어떻게 살지 생각하는 중이다. 제 버릇 못 버리고 성실하게 이 숙제를 하려고 책도 열심히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지하게 물어보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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