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미 적령기도 지났습니다...
매우 평범한 30대 중반 여자들에 비해 아주 조금 자유로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비혼주의자인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사실 나는 알면 알수록 유교걸(?)에 결혼지상주의자이다.
친구들의 아이들은 너무 귀엽지만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는, 정확히 말하자면 잘 길러낼 자신도 없고, 그럴 깜냥도 안되고, 거기에 시간을 쏟을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진작에 포기한 딩크 지향주의자인데, 생각이 바뀔 가능성 정도는 열어놓고 있다. 인생은 그 어떤 것도 장담하면서 살 수 없기에. 왜냐면 우리 사촌언니가 마흔에 속도위반으로 결혼했거든. 특파원 준비하다가.
나도 사실 평생 아이 생각이 없다가 요즘 냉동난자를 고민한다. 인간은 이렇게 계속 변한다.
꽤 어렸을 때부터 일을 해서 모아놓은 돈도 적지 않고, 재테크에도 열심히며, 연봉도 나쁘지 않다. 모은 돈으로 사치품보다 내 시간을 사고 싶다. 그래서 파이어족을 지향하며 산다. 경제적 자유가 있는 나는 스스로 즐거워하는 일을 하며 세상에 조금 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혼자서도 뭐든 잘한다. 그렇지만 함께할 때 기쁨이 더 크다는 걸 잘 안다. 예전에는 혼자서 뭘 못하는 사람들이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인간은 원래 혼자일 때 더 편하다. 누군가와 함께하면 불편하고 눈치 보고 배려해야 하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너머의 행복을 아는 사람인 거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실제로 기대지 않더라도 그냥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 자체에 안도한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맞추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깎여야 하는 나를 어렸을 땐 못 견뎌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깎인 나의 빈자리에 그 사람이 채워줄 세상이 기대된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는 별개로 겁이 많은 편이라 불확실한 미래를 함께 걸어갈 든든한 사람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결혼이 하고 싶다. 그 결론이 왜 결혼이냐고 하면 책임감이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일종의 욕망이랄까. 나도 평생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사회적 선언이랄까. 아니면 마음을 다한 상대와 이별할 때마다 너무 아프니 더 이상 이별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인 걸까. 뭐가 됐든 진짜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
결혼을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나이브했다. 특히 아이 생각도 없었으니 서로 잘 맞출 수 있는 사람이랑 언젠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까웠지. 뭐 그게 이렇게까지 늦어질 줄은 몰랐지만.
늦었다고 자각한 순간 결혼이 빨리 해결해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자꾸 스텝이 꼬였다. 누군가를 만나면 안 될 상태에서 만났고 그래서 체하는 기분이었다.
Y와 올해 초에 이런 대화를 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늦었으니 서두르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인 시간에 충실하며 나는 어떤 사람과 잘 맞았나, 어떤 단점을 견딜 수 있고 어떤 단점을 견딜 수 없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결혼이 꼭 나에게 필요한지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오랜만에 한 소개팅에서 그를 만났다. 그를 만나면서 느낀 감정 중 가장 신기했던 건 그동안 내가 했던 이별이 모두 합당하게 느껴졌던 거다. 아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고 그런 힘든 이별의 시간을 거쳤던 거구나.
그는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센 척이나, 강한 척, 있는 척을 하지 않았다. 겸손이 디폴트였고 배려가 몸에 배어있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친절한 것이 강한 것이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 주고 예뻐해 줬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인생의 타임라인이 달라도 나는 미래에 그와 함께 한다는 게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간에.
일관성 있는 남자와 안정된 관계를 가지고 싶었다. 한 사람을 깊게 이해하고 세상이 넓어지는 경험을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아닐 수도 있다는 전조증상이 보여도 무시했다. 물건도 잘 못 버리는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을 선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예측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예측 불가능한 타이밍에 이별을 고했다. 짧지만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혼자.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보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가 더 궁금하다. 그리고 그 인생의 방향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다르더라도 맞춰나갈 수 있는 유연함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그 사람 앞에 서고 싶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의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싶다. 그러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서 있는 게 중요하지 않아 졌으면 좋겠다. 그 너머의 세계로 그와 함께 건너가고 싶다.
나를 고치거나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사이는 있을 수 없으니 그런 게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과의 현재가 만족스러워서 자연스럽게 미래를 꿈꾸고 싶다.
나는 욕심이 많은 편인데 내 것을 전부 떼어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을 만나면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