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위치
“행정반으로 잠깐 와봐.”
수송차 운전이 이제 막 몸에 붙기 시작하던 어느 날이었다.
기분 좋은 엔진 소리에 취해 있던 그때,
갑자기 마상병이 나를 불렀다.
그가 걸어가는 뒤를 따라 행정반 문을 열었다.
안에는 책상, 컴퓨터, 프린터,
그리고 묘하게 냉정한 공기가 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간부들과 선임들의 시선이
내 전신을 스캔하듯 훑었다.
“너 이거 좀 해볼래?”
“네?”
그 한마디로 인생이 바뀌었다.
그렇게 나는 ‘행정병’이 됐다.
운전병도 아니고, 정비병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진 잡탕병.
오전엔 운전대를 잡고,
오후엔 보고서를 썼고,
밤엔 불침번 근무를 섰다.
“나는 도대체 무슨 병과인가…”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뭐라고 적어야 할까.
‘멀티플레이어형 인재’?
아니, 그냥 남는 퍼즐 조각 같았다.
무기력한 사람은
타인의 욕심을 대신 살아야 한다.
그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
행정반에서의 첫 임무는
‘검작지 수백 장 정리.’
눈을 쓸던 손이 펜을 쥐었고,
기름때 묻던 손끝에 볼펜 자국이 번졌다.
처음엔 글씨가 삐뚤었지만,
며칠 지나니 보고서 문체가 손에 익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그게 꼭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익숙함은 때때로 감옥이 된다.
하루는 소대장이 담배를 피우다
말없이 내게 말했다.
“넌 뭘 해도 무던하게 잘한다.”
그 말, 이상하게 찔렸다.
‘무던하다’는 말은
칭찬 같지만, 결국 아무 데나 끼워 맞출 수 있다는 뜻이다.
쓰임은 많지만, 존재감은 없는 사람.
어디에나 쓸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간.
나는 몰래 컴퓨터를 켜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디자인이 아니라, 얼굴이었다.
이 부대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그 속에 나도 있었다.
처음엔 연필이 손을 떠났고,
이내 마음이 따라왔다.
그림을 그리면,
어정쩡했던 내 하루가 잠시나마 ‘정확한 선’을 가졌다.
‘그래, 나는 이대로만 살 순 없다.’
모니터 불빛이 조용히 내 얼굴을 비췄다.
어쩌면 그건,
내 안의 불빛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나는 ‘어디에 속할까’를 묻기보다
‘무엇으로 살아남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