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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Oct 31. 2019

커피에 홀려 카페에 홀릭

 주민센터와 은행과 우체국을 오가며 서류 정리를 마치고 난 후의 오후는 약간 지쳐 있었다. 숫자와 문서를 다루는 공공기관에 떠도는 꼼꼼한 분위기의 압박감 속에서, 차례가 호명되어야 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수동적인 지루함을 연속적으로 견디다 보니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폰의 충전잭을 꼽는 기분으로 동네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입이 텁텁할 때면 껌을 씹어 상쾌한 입안을 만들어내듯이. 불쾌한 것도, 슬픈 것도, 화가 나는 것도 아닌 낮은 단계의 불유쾌함. 마음에 담아두기는 찜찜한데 그렇다고 소리 질러 발산해야 하는 수준도 아닌, 애매한 단계의 텁텁함을 헹구고 싶을 때, 스타벅스는 예측 가능한 대안이 되어준다.    


 멘탈의 리스테린을 주문하는 기분으로 카페라떼를 달라고 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아 한 모금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대체 언제부터 커피가 나의 멘탈 회복제가 된 걸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죽은 자들이 보내는 신호인 게 틀림없다는 기이한 상상에 빠져 들어갔다. 땅 속에 묻힌 시체들이 혼을 모아 커피 열매에 기운을 불어넣는 게 아닐까. 평생 일만 하다 죽은 게 억울해서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은 채.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 자꾸 커피 열매 뿌리에게 하소연하는 거다.     
 ‘살아 있는 자들에게 전하거라. 일만 하지 말고 쉬기도 하라고.’    
 땅 밑에서 시체들의 음성을 듣고 자란 커피는 세상에 나와 자기 할 일을 다하는 거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커피 한 잔 하면서 쉴틈을 주려고….   


 내 멋대로의 상상과는 달리, 카페의 많은 이들은 휴식보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인용 테이블이나 널따란 공용 테이블 한편에 앉아 노트북으로 디자인을 하거나 뭔가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업무 미팅으로 보이는 만남도 몇 되어 보였다. 원래 카페는 쉬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인데. 쉼터조차 일터로 삼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애쓰는 우리 민족의 저력에 존경심과 짠함이 뒤섞여 밀려왔다.     


 밥 벌어먹으면서 ‘살아있음’을 유지하기란 이렇듯 힘든 것이었다.    


 밥 벌어먹으면서 ‘혼자 있음’을 유지하기란 역시나 까다로운 것이었고.    


 일터에는 나와 취향과 생각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배치되어 조직의 형태로 서열화되어 있고, 그 안에서 어울리려면 눈치도 봐야 하고 행동거지도 살펴야 하며 때론 그 모든 걸 다해도 밉보이기도 한다. 미움을 받는다는 건 내 존재의 생기를 말살하려는 죽음의 사자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쏘아보는 일과도 같아서 웬만하면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꽤 피곤하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 가끔은 그냥 나의 방식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미움받을 가능성이 없는 혼자의 상태로 있고 싶어 진다.     


혼자 있음의 편안함을 절정으로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은 집이지만 그마저 지치면 나 홀로 있는 집이 적막하기도 하고 사람의 온기가 그립기도 하고, 나 외의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활력을 느끼고 싶어 진다. 그럴 때는 카페에 가면 된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음이 어색하거나 눈치 보이지 않는 공간. 그런 면에서 커피는 또 한 번 껌을 씹는 일과 비슷하다. 상대 없이 혼자 씹고 서 있어도 그리 주목을 끄는 모양새가 아니라는 점에서 커피는 껌과 같다.    

 

 카페 안에서 밥 벌어먹으면서 혼자 있음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껌을 씹듯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단물 빠진 껌을 버리고 싶은데 버리지 못해 턱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손가락에 듬뿍 묻은 인주로 지문을 찍어 자기의 존재를 인증하듯, 키보드에 쉴 새 없이 지문을 찍으며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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