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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생긴 뒤

겪게 되는 세계관의 변화

by 윤서영

얼마 전 손예진이 처음으로 혼자서 유튜브 채널에 나왔다. 바로 정재형의 <요정 재형>. 워낙 좋아하는 배우여서 재미있게 듣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파트는 바로 아기가 생긴 뒤 그녀의 심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말인지 비교가 안된다. 남편의 감기에는 무관심해도, 아이가 아프면 마음이 찢어진다

그녀는 아이랑 함께일 때에는 정말 사소한 순간들에서도 완전한 행복감을 느낀다며, 아기와 그네를 타는 순간 하나하나도 너무 소중하다고 이야기했다. 일을 하면서 계속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매진하던 그녀가 다른 템포로 인생을 지금 바라보게 되고, 더 즐기게 되었다는 이야기. 전체 영상 중에서는 짧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다.


아이가 생긴 뒤 겪게 되는 변화는 점층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듯한 세계관의 변화이다. 삶의 축이 완전히 바뀌는 느낌. 오늘은 내가 느낀 변화들을 한번 적어보고 싶다.


1. 연민, 공감의 범위가 무한으로 넓어진다.

모든 작은 것들, 아가들, 부모들 나아가 생명체에 대한 경이와 연민의 마음이 생긴다.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머리로 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작은 생명체들에게 연민이 생기다가, 그 범위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조금 큰 아이는 우리 아기의 곧 다가올 미래, 나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의 미래, 그리고 아이의 먼 미래. 내가 그리고 아이가 곧 지나갈 삶의 궤도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진다.


연민의 범위가 넓어져서 인지 예전만큼 화가 많이 나지 않는다. 화도 더 빠르게 없어진다. 일에서 나를 속상하게 하는 상대더라도, 그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을 안다. 그에게도 일은 일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 진정한 '이웃'이 생긴다.

도시에서 계속 살아온 나에게 가까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뒤에는 자연스레 친구들이 만들어졌다. 그 친구들은 주로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 나는 1년 반 정도 전부터 같은 아파트의 23년생 아가들 엄마들과 교류하면서 일주일에도 여러 번 같이 만나서 아이들을 놀려왔다. 아가들의 낮잠이 어려 번일 때에는 오전에도 만나고, 오후에도 만났다. 같이 차를 태워주고, 놀릴 만한 곳들을 함께 다녀오고, 아이들의 음식을 하면 서로 품앗이로 문고리를 나눔을 한다. 얼마 전 우리 아기가 열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엔, 성분 계열이 다른 해열제를 급하게 빌리기도 했다.


이웃의 범위는 엄마를 넘어서 하원 돌보미 선생님일 수도 있고, 아이의 동 또래 엄마가 아닌 몇 살 위 엄마로 확장되기도 한다. 놀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면 눈인사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도 한다. 비슷한 연유로 다른 엄마들은 매일 가는 카페 사장님과 진정한 이웃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3. 완전함을 느낀다. 혹은 나의 불완전함에 대하여 잊게 된다.

사실 딱히 불행한 것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나의 10대부터 30대 중반까지는 무언가 조금씩 새고 있는 것 같은 구멍을 계속 달고 살았다. 커리어에 대한 생각도, 라이프에 대한 생각도 '이게 최선일까?'라는 의구심과 무언가 다른 길을 갔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기웃거림이 항상 공존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뒤에는 그 구멍이 말끔하게 메워졌다.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것이 최선이 아닌지에 대한 고민들은 그다지 하지 않게 된다. 아이와 둘이 있을 때, 아이가 나를 보고 표정을 지을 때엔 이 세상에 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생각,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그 자리에 존재하기만 해도 된다. 시간이 멈추고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 빠르게 커가는 너의 하루를 내가 이렇게 함께 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하다.


4. 쪼그라든 나의 자아 때문에 슬퍼지진 않는다.

이 모든 변화에는 내 세계에서 '나'의 비율이 작아지는 걸 의미한다. 나의 시간, 나의 선택, 나의 삶에서 아이가 우선순위가 되고 그를 중심으로 모든 것들이 설계할 수밖에 없다. 보지 못하는 영화, 가지 못하는 술 모임, 펼쳐보지 못한 책, 경험하지 못하는 미식 공간들이 계속 쌓여가는 것. 어딘가 아파서 병원에 가려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시간을 빌려 써야 하는 것. 처음에는 내 세계에서 정작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당혹스러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균형감을 찾았고 아이가 커서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가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론뮤익 전시도 함께 무사히 관람하였다. 작년에는 더 이상 꾸미지 않는 나, 시간이 없어서 일을 더 잘 못하게 되는 나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졌었지만 올해에는 그러한 감정도 잊어버렸다. 제약들은 타고난 제약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확장된 나의 세계 안에서 조금 줄어든 나의 자아는 이제는 슬프지 않다.


아쉽게도 아이가 생긴 뒤는 간접 체험이 쉽지 않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변화를 경험했으면 좋겠다. 삶에서 일순간에는 완전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느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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