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질'에 집중!
케빈 베이컨 게임이 있다. 영화 배우 케빈 베이컨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을 통해 사람들은 연결해나가다 보면 몇 단계 만에 다시 케빈 베이컨에게 닿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해본 결과 사람들은 여섯 단계 이내의 연결 고리만 거치면 지구상 대부분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 세상 좁다’는 말을 입증해준 이론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얼마나 사람들과 촘촘히 연결돼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말했다. 인간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우리는 가족은 물론 학교나 직장, 다양한 모임을 통해 어떤 형식으로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만큼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타인에게서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이다.
문제는 사회적 삶 속에서 우리가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에 구속받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의 본질적 욕구 탓이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누고 있다. 가장 낮은 1단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이고 그 다음은 안전 욕구, 소속과 애정 욕구, 존중 욕구 순이다. 가장 높은 단계의 욕구는 자아실현 욕구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단계의 욕구를 살펴보자. 세 번째인 소속과 애정 욕구는 가족과 친구 등 사회적 관계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사랑 받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네 번째인 존중 욕구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고, 명예를 얻고 싶은 욕구이다. 이 두 가지의 욕구는 우리가 왜 그토록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인간이 이런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실 지금처럼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연결돼 있지 않던 시절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거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소셜미디어로 실시간으로 연결돼 있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실시간 과잉관계’가 현실화됐다. 소셜미디어에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친구’를 둘 수 있는 ‘친분 과잉’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 만큼 수많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를 실시간으로 의식하는 현실 앞에 우리는 놓여 있고 그로 인해 과잉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 소셜미디어만 봐도 그렇다. 사실 ‘친구’란 명목의 관계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말이 친구이지 얕은 관계를 양산한 것에 불과하다. 관계의 질은 생각하지도 않은 양적 관계의 확대판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박수받을 수 있는, 자랑할 만한 글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글을 올린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는지를 노심초사하며 지켜보기도 한다. 행여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내용의 글을 실으면 상처를 받기도 하고 내가 올린 글에 타인의 반응이 시들하면 시무룩해지기도 한다. 타인이 실시간으로 코앞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내가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소셜미디어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실제 본인의 모습과는 다르 게 소셜미디어에서 타인의 평가를 통해 형성되는 ‘가공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했다. 타인 자체가 ‘지옥’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생활인데 타인 자체를 지옥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의 참뜻은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자유로운 존재로 살지 못하면 그 삶이 ‘지옥’이라는 의미이다. 오쇼는 ‘장자, 도를 말하다’에서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왜 그토록 남들에게 신경을 쓰는가? 너무 많은 신경을 쓴 나머지 제대로 살 수도 없지 않은가? 모두가 남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남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대를 신경 쓰고 있고, 그리고 그대는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
“‘남의 눈치’가 큰 병이다. 아무도 편안하지 못하다. 아무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삶은 지옥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연연해한다. 하물며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소셜미디어에서조차 아예 실시간으로 타인의 시선 앞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자신을 타인의 평가 앞에 맡겨둔다. 물론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컨대 한 회사의 어떤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면 수시로 업무의 성과 등에 대해 평가를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런 제도적인 공식적 평가는 사회적 삶의 정상적 구성 요소이고 힘들더라도 여기에 잘 대응해나가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범위를 넘어서서 개인적 삶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양산해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피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데 있다. 자신이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해법은 분명하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삶에 무게중심을 둬야한다. 타인이 기대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을 자유롭게 펼쳐가야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거리가 필요한 이유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기 신뢰’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내 인생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지, 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고적한 상태를 유지하라. 그들의 혼란 속으로 뛰어들지 말라.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내 미약한 호기심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내 곁에 다가올 수 없다.”
중요한 말이지 않은가? 누군가 과잉관계에서 보는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면 이는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선택 때문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내 곁에 다가올 수 없다.“
에노모토 히로아키도 ’때로 외로움은 삶의 방패가 된다‘에서 말한다.
”창조적이고 마음이 풍요로운 생활을 보내려면, 세상의 소란함으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또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몰라 머뭇거릴 때에도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혼자 있을 때 가능하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써온 글은 필자 스스로 최근에 느낀 점과 깨달음, 그리고 다짐을 담고 있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스스로 자초해서 만든 과잉관계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고적한 상태에서 자유롭게 어떤 일을 결정하고 해나가기보다는 내가 끌어들인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화상이 보였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결정의 내용은 ’타인의 시선으로 살기 그만두기‘와 관계 줄이기다. 이를 위해 페이스북과의 거리두기에 나섰다. 과거에는 이삼일 간격으로 올리던 글을 일주일에 1회 정도로 줄인 편이었지만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크게 축소하고 다른 사람 글도 그때 잠깐 보고 말기로 결심했다. 실행에 옮긴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는데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을 의식하던 마음의 공간을 비우니 편안하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풍성한 느낌이 든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필자가 또 한 가지 변화를 준 것은 관계 축소이다. 관계의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기로 했다. 별다른 의미 없이 ’네트워킹‘이란 명목으로 얕게 유지돼온 관계를 대폭 정리했다. 빠져나온 단톡방이 제법 된다. 대신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관계에 집중하기로 했다. 적어도 마음을 열고 서로의 삶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들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뭐 그리 많은 관계가 필요할까 싶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관계보다는 인생의 동반자인 소수의 관계가 나에겐 더 중요하고 정겹다.
그래서 오쇼의 이 말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연관된 사람의 수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