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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

'인간의 품격'

by 우보

트리나 플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은 호랑 애벌레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애벌레들은 왜 그런지 무엇을 향하는지 이유도 잘 모르는 채 떼를 지어 위로만 오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애벌레들이 하늘로 점점 치솟아 커다란 기둥을 이룬다. 이 애벌레 기둥에서 호랑 애벌레들은 서로 자신이 먼저 위로 오르려고 서로 떠밀리고 차이고 밟힌다. 말 그대로 앞뒤 안 가리는 경쟁의 도가니이다.


그런데 이 글의 주인공인 노랑 애벌레는 맹목적으로 위로만 올라가려고 덤벼드는 애벌레들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위로 올라가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한다. 그러던 중에 고치 속에 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난 다음 나비가 되는 꿈을 품고 실을 뽑아내며 고치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간다. 애벌레에 맞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는 나비가 돼 세상을 날아다니는 것. 하지만 애벌레 기둥 위에서 다른 애벌레들을 제치며 정상에 오른 호랑 애벌레는 알게 된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높은 자리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여기저기에 애벌레 떼들이 악착같이 만든 기둥들이 서있었다. 바벨탑 같은 기둥들.


그곳에서 호랑 애벌레는 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를 만난 다음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애벌레 기둥을 내려온다. 내리막길에 호랑 애벌레는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애벌레들에게 말하지만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한 애벌레는 “설령 그게 사실이더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우리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침내 밑에 내려온 호랑 애벌레는 나비(노랑 애벌레)의 도움을 받아 고치를 만들고 나비가 된다.


이 얘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위로만 올라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며 쌓아진 애벌레 기둥은 우리의 실제 삶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들어서는 순간 경쟁의 쳇바퀴 속에 들어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가야 하는 ‘피로사회의 삶’.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가 하는 얘기를 하고 싶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성공’이라는 말의 기준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했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큰 명예를 얻는 것을 성공으로 정의하는 것은 따져보면 상당히 폭력적인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성공의 기준을 달성한 사람이 소수일 수밖에 없어서이다. 그렇다면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실패한 삶을 산 것으로 ‘매도’하게 된다. 얼마나 잘못된 기준이고 잘못된 말인가?


이어령 선생은 이런 관점에서 ‘넘버 원(Numer One)’과 ‘온리 원(Only One)’의 삶을 대비하며 ‘온리 원’의 삶을 강조했다. ‘넘버 원’은 사람들을 줄 세워 1등만 가려내려는, 앞에서 말한 잘못된 성공의 기준이다. 떼 지어 위로만 올라가려는 애벌레 기둥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이다. ‘넘버 원’ 대신 ‘온리 원’을 중시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에서 뚜벅뚜벅 자신의 삶을 살아내며 자신만의 특색 있는 삶을 만들어낸 사람은 모두가 성공한 사람이 되는 관점이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노랑 애벌레가 애벌레 기둥에서 내려온 다음 고치를 만들어 마침내 나비가 된 것 같은 삶이다. 자신만의 고치에서 나비가 돼 세상을 날아다니는 삶.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삶인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가 돼야 한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사람의 본성을 두 가지로 나눈다. 아담 1과 아담 2이다. 아담 1은 커리어를 추구하고 야망에 충실한 본성이다. 아담 2는 내적인 성장을 지향하는 길이다. 사실 삶 속에서 우리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아담 1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신에 맞는 안 맞든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올인’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른바 나를 내세우는 ‘빅미(Big me)’ 현상이다. 주목받고 명성을 얻기 위한 욕구에 사로잡힌 삶이다.


‘빅미’는 능력주의와 맞물리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세우고 광고하라고 권한다. 게다가 사람들을 물질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한다. 과거만 해도 사람들은 최소한 겉으로라도 철학적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지만 이제는 돈에 가장 관심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시대가 됐다고 브룩스는 진단한다. ‘빅미’의 특징은 소셜미디어에서 두드러진다. 브룩스는 이렇게 말한다.


‘소셜네트워크 기술로 인해 우리는 극히 경쟁적으로 남의 주의를 끌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마치 승리를 거둔 것처럼 느낀다. 소셜미디어에 통달한 사람들은 실제 삶보다 훨씬 행복하고, 훨씬 멋져 보이는 자기 이미지를 만드는데 시간을 바친다.’


‘빅미’를 내세운 아담 1의 삶은 어찌 보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는 피곤한 삶이다. 또 한 가지를 성취해도 다시 다른 것을 욕심내게 되기 때문에 만족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적으로 성장하는 아담 2로서의 삶이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아담 2는 자신의 내면을 풍성하게 성장시키면서 인격적으로 성숙해 가는 삶을 추구한다. 그렇다 보니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양의 덕을 추구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할 뿐 세상에 대고 자신을 증명해 보일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겸손한 자세가 몸에 배어있고 욕구를 절제할 줄 알기 때문에 만족감 속의 평온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이 아담 2와 ‘온리 원’을 결합하면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자기를 내세워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피로 사회의 삶’은 위로 솟구친 애벌레 기둥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기 학대’의 삶일 수 있다. ‘왜’라는 질문을 잊지 않고 ‘애벌레 기둥’과 거리를 두며 자신만의 영역을 우직하고 겸손하게 다져가는 삶, 그러면서 내적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가는 삶이 깊은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삶이지 않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장수시대에는 아담 1의 삶의 시효도 그리 길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아담 1의 삶을 살아왔더라도 50대 중후반에 직장을 나오게 되면 그 삶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남은 긴 인행의 후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해봐도 아담 2의 삶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자신을 내적으로 성장시켜 가는 아담 2의 삶,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게 ‘온리 원’의 삶을 펼쳐가는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잘못된, 세상의 성공 기준에서 해방돼 자신만의 성공을 이뤄나가길 응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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