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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간의 영국 표류기

6. 고풍스러운 근육질의 도시, 스코틀랜드

by 한정선

에든버러는 10년 만의 재방문이다.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아들의 가이드로 남편과 나, 아들 셋이 간 여행이었다. 하지만 언덕 아래 공주방같이 예뻤던 Airbnb와 무슨(?) 궁 관람, 그 외에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번 간 곳을 왜 또 가냐는 남편의 성화에 글래스고우 호텔을 예약했는데 아들도 나도 에든버러가 마음 한 귀퉁이에 에 남아있었나 보다. 스코틀랜드 가기 하루 전, 리버풀 Albert Dock을 가는 전철에서 ‘여기 친구들이 에든버러 가지 왜 글래스고우 가느냐’고 한다는 아들의 말에 갑자기 노선변경에 들어갔다. 핸드폰을 켜니 예약 호텔 무료 취소가 15분 남은 상태, 얼른 취소하고 검색에 들어갔다. 10년 전 에든버러 Airbnb의 추억으로 무조건 Airbnb로 예약했는데 다행히 호스트의 승낙 메시지가 빨리 왔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종일 놀다 숙소로 돌아오니 호스트 사정으로 숙소가 취소됐다는 메일이 왔다. 당황할 사이도 없이 당장 내일 저녁 잘 곳 찾기에 돌입, 이제 남은 답은 호텔뿐, 예약하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Airbnb에서 20만 원 할인 바우처(사과용)가 들어와 있다. 하루 전이라 호텔 취소는 불가능, 울며 겨자 먹기로 Airbnb 포기. 여행 중, 변수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 또한 여행이니까. ‘즐겁고 편안한 여행’이라는 카드를 뒤집으면 ‘지루하고 재미없는’이 나올 수도 있다.

올해 중앙아시아, 포르투갈 패키지여행이 그랬다. 관광버스 안에서 보이는 평화로운 바깥풍경은 음 소거된 영화 세트장 같았고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마치 감금된 느낌, 여행지를 생각하면 숙식을 함께한 사람들이 먼저 떠오르는 이상한 순환, 여행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변수와 에피소드조차 발생의 여지가 없는 그야말로 ‘편안함의 습격’이다. 숙식 교통 모든 게 선택이 아닌 필수, 따라다니기만 하니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내 생각이 없으니 여행기를 쓸 수도 없었다. 즉 변수와 에피소드가 여행기의 불쏘시개가 되어준다는 얘기.

영국 대부분의 도시들이 평지인데 반해 에든버러는 언덕의 도시다. 7개의 언덕으로 만들어진 울룩불룩한 근육질의 도시다. 그래서 내 기억 속의 에든버러는 ‘오르락내리락’이다. 위에서 보면 지하 몇 층은 되어 보이는데 내려가면 지상인 집과 건물들, 하물며 층층으로 된 동네 공원도 있다. 첫날, 역시나 길 아래 깊숙이 내려앉은 호텔에 짐을 풀고 내일 여행을 위한 구도심 답사에 들어갔다. 에든버러 3번째 방문인 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가게들이 신기한 지 ‘엄마 여기 생각 안 나?’ 내 답은 ‘전혀’. 아들은 핀잔대신 ‘다행이다. 처음 같으니’라는 명답을. 그때 나는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일까. 아마 해외 출장중? 엄마에게 가족 여행은 출장이니까. 지형지물에 약한 유전자도 한 몫.

둘째 날 오전 홀리우드성 관람 후 본격적인 구도심 탐방에 나섰다. 중세 영화에서나 본듯한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한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를 걸으니 시공간이 이동한 듯, 평행이론의 환각에 잠시 빠진다. 엔틱 그 자체인 건물들은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변색되었지만 그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는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건재하다. 이유는 험난한 지형과 기후로 1,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당연지사다.

런던의 빨간 버스처럼, 스코틀랜드의 시그니처는 민속의상을 입고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사람들이다. 10년 전 보다 연주자들이 많아지고 연령과 의상도 다양해졌다. 생존경쟁은 관광지도 예외가 아닌 것이 멀리서 보면 풍경이고 가까이서 보면 전쟁이다. 해마다 국제 페스티벌이 열리는 에든버러에서 음악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에든버러 성 앞 광장은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과 연주자보다 더 신이 난 관람객들로 넘쳐난다. 석양을 조명 삼아 음악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로 술렁이는 거리에서 잠시 쉬어가는 여행자들.. 거리와 사람 풍경은 위로와 위안이다.



이틀 내내 에든버러를 다니고 3일 차, 처음 우리의 목적지였던 글래스고로. 화려했던 과거의 흔적과 현대적 매력이 공존하는 글래스고우는 에든버러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로 주요 관광지가 인접해 있어 당일치기 여행코스로 적당하다. 오전에 켈빈그로브 아트 갤러리방문, 무료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웅장하고 많은 컬렉션에 눈이 휘둥그레.(글래스고우 대부분의 박물관 미술관은 무료) 오전이라 비교적 한적한 관내 카페에서 간단한 식사와 그림 한 장, 오후에는 바로 옆의 글래스고 대학교로 갔다. 570년의 역사의 명문대는 밖에서 볼 때는 거대한 박물관 포스인데 들어가서 창문을 들여다보면 공부하거나 토론 중인 학생들의 모습, 안과 밖의 다른 풍경에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조용한 캠퍼스에서 해바라기 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마치는 종과 함께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을햇살 속에 울려 퍼지는 삼삼오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의 종알거림, 이런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부러움, 질투, (이 나이에?) 회한, 여러 감정의 교차, 이럴 땐 처방전은 ‘그림 선’, ‘너도 해 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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