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비난과 괄시를 몸소 느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광인들. 때로는 감옥에, 때로는 병원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하고, 좁은 병실에 갇힌 짐승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광기어린 손짓몸짓은 수많은, 이른바 ‘정상인’들에게 고한다. 시공간이 뒤틀리고, 역사와 시대가 역행할 즈음, 미치광이의 자리는 불현듯 성스러울 것이라고.
우리는 참으로 기준과 잣대를 좋아한다. 흑백을 나누고, 하늘과 땅을 가르고, 심지어 사람과 사람을 구분한다. 무슨 심보인지는 모르겠으나, 게으르고 거만한 것은 확실하다. 혹여 신 때문일까? 전능한 신의 장난이 이 악랄한 흑백논리를 갖게 한 궁극의 근거가 아닐까하는 반항 어린 생각이 든다. 태초의 구별, 최초의 흑과 백, 그것은 선악의 구분일 터이다. 신께서는 뭉툭한 톱날로 사정없이 선악을 갈라놓았다. 질기고도 질긴 둘의 사이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나눠졌다. 그 이후, 한없이 어리석은 인간은 제 나름의 선악을 만들어 나갔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도 온전히 알지 못한 채로, 세상을 난도질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인간의 악’은 침묵과 습기로 무르익은 망망대해로 쫓겨났다. 자칭 선한 인간들은 그들을 바다로 내몰았으나, 타칭 악의 무리들은 넓은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자유를 만끽하였다. 그러나 선한 질투와 선한 시기는 악인들의 정의로운 자유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도덕과 이성의 이름으로 악인들을 처단하였다. 구속하고, 억압하고, 짓누르고, 죽였다. 진정 ‘선한’ 살육이 아닐 수 없다.
미치광이, 정신병자, 광인. 그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악(惡)’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우리들, ‘선한 정상인’이 보기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격리시켜야 마땅하다. 역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우리들이 보기엔 말이다. 그들은 정상인의 기준에 어긋난다. 사실 정상인의 기준은 정상인을 규정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광인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성의 잣대가 명령하는 바를 따르지 않는 그 미친 인간들을 철저하게 사지로 내몰기 위한 것이다. 보다 완벽하고 선한 사회, 법과 질서가 합리적으로 지배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광인은 희생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너와 내가 정한 그들의 자리이다.
광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를 뿐, 자신들의 세계를 겸허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 조금 다른 타인들은 광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정한 상식의 울타리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울타리 밖의 광인들은 비상식적인 악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광인을 광인답게 만드는 것은 광인이 아니다. 울타리 저편의 망아지가 울타리 밖에 있게 된 것은 망아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울타리를 친 여느 속 좁은 누군가의 책임이다. 또한 울타리 안의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를 보며 혀를 차겠지만, 망아지가 보기엔 오히려 그가 울타리 안에 갇힌 불쌍한 처지일 것이다. 스스로를 이성적, 정상적, 일반적, 상식적, 보편적 등의 선한 울타리 안으로 가두어 버리는 너와 나는 과연 올바른가? 혹여 다수의 인정을 받기위해, 역사의 정도를 걷기위해, 무지몽매한 자박의 생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 순간에도 니체의 철학을, 고흐의 예술을 찬사한다. 그렇다. 말년을 정신병자로 장식한 니체의 명언은 우리네 삶에 날카로운 단비를 내려주고, 자신의 귀를 자른 미치광이 화가 고흐의 그림은 그 천재적인 표현에 마지않아 시대적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들의 광기어린 업적들이 없었다면, 정상인인 우리는 절대로 정상적인 오늘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미치광이의 자리는 차가운 흙길이었다. 순전히 타인들이 내준 자리였다. 허나 그들은 그 흙먼지 속에서도 자신들의 역사를 썼고 결과를 남겼다. 그것은 이성과 상식이 감히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태만과 자만을 버린 광기의 산물, 단적으로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