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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Nov 03. 2020

그랜드 센트럴역의 해후

뉴욕 맨해튼




" …… 제 사진을 보내달라 하지 마세요. 당신 마음이 진심이라면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사진  제가 미인이당신이 외모 때문에  좋아한다는 의심이 들 거예요. 만약 제가 수수한 얼굴이면 당신은 외로움을 달랠 누군가를 찾는구나라고 생각할 거구요. 저는 사진부터 확인하는 만남은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뉴욕에 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그때 결정을 내리면 되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우리의 만남을 거기서 그만둘지 아니면 이어갈지는 당신이나 저도 선택할 수 있다것을요."



그랜드 센트럴역은 1871년 코넬리어스 밴더빌트가 세운 맨해튼 제일 아래쪽 기차역이다. 매연으로 증기기관차의 운행이 금지된 42가 밑으론 말이 끄는 마차가 기차를 대신했다.


슐라밋 키쇼르의 단편 《사랑의 약속은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홀리스 메이넬이 존 블래포드 공군 소위에게 보낸 편지 글 곱씹으며 파크 애비뉴와 42가가 만나는 그랜드 센트럴역으로 걸었다. 연말이 얼마 남지 않은 뉴욕의 11월이었다. 낼모레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거리는 크리스마스 대목을 노리는 장사꾼들로 청거릴 것이다. 그때쯤 나는 뉴욕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4년이란 월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통과했다.


그동안 나의 시간은 고체였다가 액체였다가 다시 기체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 벽,  소리에  면의 고치다 의식의 경계에서 슬처럼 반짝무언가를 보았다. 해가 뜨자 그일상의 분주함으로 기화하여 형태를 분간 수 없었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확인하고 싶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연수(戀愁)의 정체가 인지. 그 마음의 동요를 내버려 뒀다간 나중엔 소용돌이가 커져 어떤 사달이 날지 모른다고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밴더빌트 홀 중앙의 티파니 유리로 만든 시계는 쥘 알렉시스 쿠탕의 디자인이다. 14m짜리 시계는 금빛을 내며 하루 종일 반짝인다.


길을 건너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덮인 보자르 양식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보자르란 19세기말 미국에서 유행한 세밀한 장식과 부드러운 아치 중시하는 건축을 말한다. 탁 트인 밴더빌트 홀 중앙에는 2천만 달러짜리 티파니 유리로 만든 4면 시계가 소설에서처럼 나를 맞았다. 천장에는 밤하늘을 수놓은 2500개 천궁 별자리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홀을 천천히 가로질러 파리 오페라하우스 입구를 본떴다는 대리석 계단까지 걸어갔다. 2층으로 가는 계단 중간 참에 올라서야 내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 접어놓은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마침 책에서도 존 블래포드 소위가 역사에 막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존 블래포드는 밴더빌트 홀에 들어서며 홀 중앙 시계부터 확인했다. 인포메이션 부스의 대형 시계는 기차역의 상징이자 만남의 장소로 유명해졌다. 여섯 시 6분 전. 몇 분 후면 지난 13개월 동안 자신의 삶에 각별한 의미로 자리 잡은 한 여인이 눈앞 출구를 걸어 나올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녀가 보낸 편지 더미가 늘 곁에 있었고, 편지 속 그녀가 그를 붙잡아 주었다. 존 블래포드는 사람들로 붐비는 안내 창구 앞에서 출구가 더 잘 보이는 자리를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이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 어느 날꿈결 같은 기억을 소환했다.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날이었다.  



그랜드 센트럴역에서 떠나는 모든 기차는 예정 시각보다 1분 늦게 출발한다. 이는 승객이 간발의 차로 기차를 놓치지 않도록 하는 종착역만의 오랜 전통이다.


그가 모는 비행기가 대형을 지어 날아온 적의 비행기 편대 한가운데 갇혔다. 저쪽 조종사가 씩 웃는 표정까지 볼 수 있었다. 출격할 때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고통스러웠던 존 블래포드는 편지에 대고 이를 고백한 적이 있었다. 전투가 있기 며칠 전 그녀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분명 당신은 두려울 것입니다. 죽음과 맞닥뜨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두렵지 않았을까요? 죽을 만큼 무서웠기 때문에 다윗은 시편 23장 문구처럼 기도했습니다.  '·…·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나는 사악함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언제나 당신이 나와 함께 하므로 ·…·' 라고요. 만약 당신이 다시 위험한 순간에 빠진다면 이 구절을 읽 목소리를 상상해 보세요.”


적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존 블래포드는 이 편지를 떠올렸다. 그러자 어디에선 시편 구절을 읽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꺼져가던 힘과 용기가 되살아났다. 그날 밤 그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모든 기차의 '종착역'이란 의미로 Grand Central Terminal이라 부른다. Grand Central Station은 지하철 역으로 다음 역이 더 있다.


존 블래포드는 이제  그녀의 실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1분 전 여섯 시. 기차가 도착했는지 지하 플랫폼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출구를 쏟아져 나왔다. 한 여인이 분홍색 꽃을 옷깃에 달고 두리번거렸다. 존 블래포드는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꽂은 건 카네이션이었다. 편지로 약속한 붉은색 장미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너무 어려서 스무 살이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홀리스 메이넬은 서른이 넘었다고 편지에 실토했었다. "그게 뭐 어떻습니까?" 존 블래포드는 얼른 답장을 썼었다. "저는 서른둘인걸요"라고. 존 블래포드는 사실 스물아홉이었다.


홀리스 메이넬을 알게 된 건  한 권 때문이었다. 플로리다 비행 훈련소의 공공 도서관에 들렀을 때였다.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 중에서 운명처럼 손에 잡힌 게 있었다. 섬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였다. 여백에는 여인의 필체로 썼다가 지운 희미한 감상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낙서란 거개가 수준이 뻔해 처음엔 눈길을 두지 않았다. 빌린 책이라 더 그랬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누군가 이토록 섬세하게 책의 내용에 반응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존 블래포드는 자기보다 앞서 책을 대출한 사람을 알고 싶었다. 딱 한 사람 이름이 뒷장 '도서 카드'에 적혀 있었다. '뉴욕시, 홀리스 메이넬'. 존 블래포드는 뉴욕시 전화번호부를 샅샅이 뒤져 기어코 그녀의 주소를 훔쳤다.



그랜드 센트럴역에는 비밀이 많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직통 엘리베이터를 타고 61번 트랙으로 바로 내려와 전용 기차에 오르곤 했다.


배를 타고 전장으로 이동하기 전날, 존 블래포드는 편지를 썼다. 새 주둔지에 도착하고 일주일 후 그녀의 답장을 받았다. 그 후 편지는 둘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편지는 서로에게 안부 이상이었다. 존 블래포드의 편지가 지 않아도 홀리스 메이넬은 벌써 다음 편지를 썼다. 그런 그녀에게 존 블래포드는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그녀도 따뜻한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사진을 보내달란 요청만 거절되지 않았어도 존 블래포드는 오늘 훨씬 덜 긴장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비행기를 타고 출격할 때보다 가슴이 더 쿵쾅거렸다. 한 여인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늘씬했다. 한눈에 봐도 시원스러운 키가 170cm는 족히 넘었다. 금발 머리 뽀얀 귀 뒤를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콧잔등을 지나 입술과 턱으로 이어지는 선은 부드우면서도 날렵했다. 허리가 잘록한 초록빛 코트는 마치 봄의 여신이 잘 차려입은 겉옷 같았다. 존 블래포드는 홀린 듯 그녀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허둥대다 보니 그녀가 장미꽃을 꽂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도 다가오는 존 블래포드를 보았다.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두세 걸음 거리로 좁혀지자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저를 기다나요, 소위님?" 존 블래포드는 하마터면 그녀를 부둥켜안을 뻔했다. 겨우 자제력을 되찾은 순간 존 블래포드는 어깨너머 또 다른 여인을 발견했다.



중앙 홀 천장의 별자리 벽화는 우리가 보는 별자리와는 거꾸로 그려져 있다. 이는 화가 폴 헬류가 천구 바깥에서 본 하늘을 그린 모습이다.


그녀는 홀리스 메이넬이었다.  갈색 코트에 꽂 붉은색 장미가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뻣뻣한 회색 머리카락을 뜨개 모자로 감췄는데 마흔은 얼추 넘어 보였다. 창백한 종아리 복숭아뼈를 지나 굽 낮은 하이힐 속 잠겼다. 블래포드가 머뭇거리는 사이 코앞의 아가씨는 그를 지나쳐 역사 바깥으로 방향을 틀었다. 존 블래포드는 혼란스러워졌다. 당장 젊고 예쁜 여인을 쫓아가고 싶지만 자신의 영혼을 지켜준 홀리스 메이넬을 외면할 순 없었다. 더구나 눈앞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녀의 지치고 핼쑥한 얼굴이 어느새 지혜로운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야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따뜻하게 반짝이고 있음을.


존 블래포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은 가죽 표지로 된 인간의 굴레 를 꺼내 들었다. 자신을 그녀에게 증명하기 위해 들고 나온 책이었다. 왼손에 쥔 책을 바지 옆선에 붙이며 생각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닐지 몰라. 어쩌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지금까지 간직해 왔고 또 앞으로도 감사해야 할 아름다운 일 거야." 존 블래포드는 씩씩하게 오른팔을 뻗어 거수경례를 한 다음 두 손으로 책을 건넸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존 블래포드 소위입니다. 당신은 홀리스 메이넬이지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제가 당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도 될까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젊은이. 방금 지나간 초록색 코트를 입은 아가씨가 나더러 장미꽃을 대신 꽂아 달라고 부탁했다우. 만약 당신이 나에게 저녁 식사를 초대하면 그녀가 길 건너 레스토랑에서 당신을 기다린다고 말해달라 하더군요. 이게 다 일종의 시험이라 합디다. 나도 두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오. 그래서 기꺼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지요."



그랜드 센트럴역은 영화에 단골 출연한다. 이터널 선샤인, 프렌즈 위드 베네핏, 어벤저스, 나는 전설이다. 맨 인 블랙, 스파이더맨 등등에 나왔다.


나는 책을 덮었다. 영화 한 편을 '빨리 감기'로 휘리릭 본 듯했다. 런데 이상했다. 소설이 주는 아름다운 반전에도 불구하왠지 모를 아쉬움이 차올랐다. 진성(verisimilitude, 逼眞性) 때문일까.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존 블래포드 소위와 홀리스 메이넬이 마주쳤 만한 출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21개 출구 중 안내소에서 이는 두 개. 그중 하나이겠 싶었다. 가장 가까운 곳을 통과해 지하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여긴 67개의 트랙이 여전히 건재하다. 지금도 매일 75만 명의 통근객을 싣고 뉴욕 외곽 웨체스터, 퍼트남, 더체스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퇴근 기차를 타려고 몰려들었다. 그들이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 불현듯 M의 떠올랐다. 크로톤 빌 야외 전시회에 가느라 언젠가 이곳에서 기차를 탔었다는. "허드슨 라인을 탈 땐 왼쪽에 앉아야 해요. 래야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햇빛이 은어처럼 반짝이는 허드슨 을 볼 수 있거든요." 그제야 나는 내가 왜 이곳을 와보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다. 어사람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기다렸던 상대방이 누구였는지 당장 알게 되는 것처럼.


그랜드 센트럴역은 '역'이란 뜻으로 'station' 대신 'terminal'이란 단어를 쓴다. 이는 '모든 기차의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뉴욕 북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기차 여기서 멈춰 마지막 숨을 내쉰다. 역을 만들 당시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의 매연을 제한하기 위해 42가 아래로는 기차가 다니지 못하게 했다. 기차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여기서 머무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그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폭주 기관차처럼 성공을 쫓아 나는 뉴욕의 심장과 허파에까지 도착했다. 지식, 권력, 돈,  목매 나는 간절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갈 곳이 마땅찮았다. 세상의 끝으로 달려오느라 쓸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인맥과 처세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 지친 버그(bug)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무엇을 내려놓고 또 어디로 떠나 하는 것일까. 네루다 파블로의 말을 빌리자면 그 소란스러운 뉴욕에서 나는 "터널처럼 외로다."



오이스터바. 추천 메뉴는 '블루포인트'(Bluepoint), '피크닉골드'(Picnic Gold)라는 이름의 굴 4개씩과 '클램차우더 뉴잉글랜드'. 위스퍼링 갤러리가 이 앞에 있다


그랜드 센트럴역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장소가 여럿 있다. 더빌트 홀의 다른 한쪽으로 내려가면 오이스터 바 레스토랑(Oyster Bar Restaurant)이란 오래된 음식점이 나타난다. 그 앞에는 천장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방 한 칸 크기 작은 공간이 있. 이름하여 위스퍼링 갤러리(Whispering Gallery). 이곳 모서리 한쪽 벽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면 그 읊조림이 맞은편 벽으로 그대로 전해진다. 그래서 '리는 랑()' 부른다.


저절로 목소리를 낮추게 만드는  좁은 공간에서 나는 슐라밋 키소르의 편, 지막 구절 꺼내 읽었다. 속삭임이란 주의를 기울여줄 귀를 필요로 하지만  위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소곤거림에게 가 닿았을까. 언젠가  누군가 되돌려주는 지막한 소리를 들을 수 있 할. 나참을 혼자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새벽녘, 상념의 거미줄에 묻어 반짝이던 간절한 한 사람에게 오래 참았던 안부를 물었다.


"그곳은 이겠. 내 편지가 당신의 함에 도착하 궁금하군요. 수신 확인 되지 않은 나의 언어는 위스퍼링 갤러리를 떠도는 허망한 읊조림이 되고 맙니다. 잘 지내나요. 아아 그러나 날 잊을 만큼 잘 지내진 말아요. 언젠가 당신이 보낸 답장을 제가 읽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당신이 태평양 건너 잠이 들면 나는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꿀 거예요. 당신이 베갯머리를 고칠 때 내 꿈은 작은 별이 되어 당신 머리 맡을 지킬 겁니다. 먼 기차소리에도 당신의 잔잔한 미소가 흩트려지지 않도록요. 나의 심장 가까이 누운 당신의 예전 같은 숙면을 위해서지요."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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