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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수다

나는 어떤 노인(老人)이 될 것인가?

김형석 <100세 철학자의 사랑수업>을 읽고

by 바람꽃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이다.
그래서 나는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지난해 백상예술대상 무대에서 소감을 밝히시던 이순재 배우님이 얼마 전 향년 90세로 우리 곁을 떠났다. 삶이 곧 예술이라면, '인간은 완성을 찾아 미완성에 머무는 존재'라던 106세 철학자 김형석 선생님 말씀과도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미완성이 가장 완전한 상태가 아닐까? 100세 언저리에 닿으면 나도 그저 내가 완전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게 될까. 아니면 채워지지 않음을 원망하며 감사하지 못한 채로 삶을 마감하게 될까. 나는 잠시 숙연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리 아등바등 사는 걸까?

김형석 <100세 철학자의 사랑수업>을 읽고

제목에서 미뤄볼 수 있듯 이 책은 100세 철학자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전능감을 경험하고 철없던 시절을 보낸 청년의 사랑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반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서투른 내가 누굴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많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결국 사랑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담백하게 나 자신을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지금 나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을까?

인격이란?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라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사람은 인격만큼 사랑을 누린다는 괴테의 결론을 끌어냈다. 그렇다면 인격이란 무엇일까? 칸트는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타인을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라 하였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격이란 이성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영혼을 다듬는 과정이라고 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격과 선(善)을 동일시하지만 나는 인격이 선의 척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격이 훌륭하다는 건 각기 다른 개성의 두 사람이 충돌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서로 존중할만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노인이 된다는 건?

나는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가? 쉰을 바라보는 내가 아는 삶이란 정답이 없는 상태를 견디는 것이다. 그저 매사에 충분히 성실하되 완벽하지 못함이 완전한 것임을 인정하는 삶이다. 이를 깨닫게 되기까지 반백년이 걸렸는데 나머지 세월 동안 반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비슷한 맥락으로 성실하게 열심히 살되 하루하루를 충분히 즐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은 젊은이에게는 참 아리송한 말일 수 있다. 마치 얼마 전 들여온 화분을 두고 문의하니 직사광선은 피하되 햇볕을 충분히 쬐어주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어찌 쉬울 수 있을까? 그 어려운 것이 삶이고 살아낸다는 것은 또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어른들의 이야기가
잔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때때로 조금만
귀 기울여볼래?

잔소리가 먹히길 바라며 과거 사춘기 딸아이에게 했던 말이다. 문득 젊은 층 독자라면 저자의 이야기가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을까 노파심이 들었다. 나 역시 또래 친구들 말이 아니면 ‘들리지 않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렇게 공공연하게 어리석음을 번복한다. 사실 저자의 인생관 중에서 어떤 부분은 상당히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다른 시대의 어른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사뭇 달랐고, 삶의 목표가 완주라기보다는 우승의 영광이라고 한 부분은 공감할 수 없었다. 의미와 가치를 좇는 삶은 공감하나 목적이 반드시 공동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던 과거 문화유산의 잔재가 아닐까? 건강한 개인이 없다면 건강한 공동체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모두 소크라테스이고 안중근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른 관점

작년쯤 100세 철학자 김형석 선생님의 책을 찾아 읽었다. 질의문답 형식이라 그런지 다정한 할아버지가 곁에서 조곤조곤 답해주는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조금 더 자서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중 이 책의 주제인 ‘사랑은 모든 것’이라는 말은 마치 나에게 ‘네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다.’라고 강조하듯 묘한 부채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살아보니 ‘늙는다는 것’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음을 깨달았고 그저 조금이라도 다가오는 ‘노인의 삶'을 이해해 볼 수 있을까 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나는 무조건 저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통찰과 지혜는 100년이라는 세월에 걸맞은 깊은 철학을 시사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리라.

사랑은 모든 것
Love Is All

나는 어쩌면 죽는 날까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것 같다. 내게 사랑은 그저 삶의 여백을 채우는 윤활유 같은 것이며 여러 종류의 사랑으로 나는 덜 뻑뻑하게 고된 삶을 견뎠다. 한편 책의 뒷부분에 저자가 담은 ‘이기주의자의 사랑’에 관한 관점은 공감하지 못했다. 저자가 철학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달랐을까? 나는 조심스레 당신은 이기적이지 않은가?라고 철학적으로 묻고 싶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이다. 어쩌면 저자는 더 많은 독자를 배려해서 힘나는 글쓰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개
VS
고뇌하는 인간

‘행복한 개’가 될 것인지 ‘고뇌하는 인간’이 될 것인지 종종 딸아이가 묻는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선호하지 않지만 오히려 이분법이 결론을 도출하는데 좋은 팁이 될 때도 있다. 나는 번뇌하는 것이 불행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다만 그 경계는 빈번하게 무너진다고 덧붙여본다. 정답은 정답이 없는 상태를 견디는 것이라는 영국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말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더 유연해지는 노인의 삶을 꿈꿔본다.





너무 오랜만에 잠시 들렸다갑니다.

중국에서 브런치접속하는 것이

갈수록 쉽지 않네요.

저는 잘,

삶을 누리고 견디고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브런치 마을의 이웃분들도

그러하시겠지요?

얼마 전 이사를 했는데

베란다에 꼿혀서

멍때리는 날들이 많아졌네요.

살짝 다녀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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