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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Dec 23. 2023

이 땅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이야기

영화 ‘덕혜옹주’ 촬영지 청주 동부창고와 남양주 묘역 탐방


바짝 추워졌다. 외출이 겁날 정도다. 집안에서만 오가다 어느 TV 채널에서 영화 덕혜옹주를 막 시작하고 있어서 주저앉았다. 어쩐지 다시 보고 싶어졌다. 다시 보는 영화, 다시 가보는 여행지는 재미없다는 이들이 있지만, 글쎄...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흐른 시간만큼 바뀌어진 내가 다시 바라보는 것, 때로 나는 그걸 즐긴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무렵이던가 썼던 이 영화이야기를 옮겨왔다. 






한 나라 왕실의 사랑받는 막내딸로 태어났다. 모순적이게도 그 신분이 일생을 기구하게 옭아맨 처연한 역사 속의 이야기, 흔히들 여자의 일생이 어쩌고 한다. 그러게 말이다. 아무리 아픈 역사 속의 이야기라지만 어쩌자고 그녀의 일생은 이토록 고달팠는지. 


영화 내용은 대충 이렇다. 1919년 일제 강점기 고종의 금지옥엽 외동딸 덕혜옹주 이야기다. 경술국치(1910) 후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으로서 일본의 황실에 포함시키려는 자들의 계략이 난무한다. 덕혜옹주(손예진 扮)는 결국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떠밀려 가게 된 것이 소학교를 마친 만 13세였다. 먼저 떠났던 오라버니 영친왕과 함께 일찌감치 일본식 교육을 받게 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을 무색하게 할 의도였다. 이를테면 볼모였다. 사실은 고종은 그 이전에 덕혜를 지키기 위해서 시종의 조카 김장한(박해일 扮)과의 혼례를 추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영화 속에서 덕혜옹주를 향한 김장한의 40년 순애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민족 수난기를 살아내면서 덕혜는 어서 빨리 내 나라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럴 때 독립운동가 장한의 든든한 배려에 의지가 된다. 하지만 조국의 어머니를 향한 걱정과 그리움에 늘 애가 탄다. 그러던 중 어머니 귀인 양 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친일파 한택수는 어머니에게 보내주는 조건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반강제적 친일 연설을 요구한다.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어쩔 수 없는 친일 연설을 시작하다가 도중에 원고를 접고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리말로 힘을 전한다.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 연설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덕혜는 어머니 귀인 양 씨의 부고를 듣는다. 결국 주변인들과 힘을 모아 상하이 망명을 결심하고 은밀히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집요한 감시에 일본을 떠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압박과 감시로 점철된 강제 일본 생활에 따른 우울증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덕혜는 극도의 심리 상태로 치닫는다. 이후 일본인 소 다케유키와 강제 정략결혼을 하게 되고 딸 정혜가 태어난다. 여전히 마음은 닫혀 있고 일상은 더욱 좁아졌다. 마음의 병은 점점 깊어질 수밖에. 이렇게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덕혜에게 마침내 일본의 패망 소식이 전해진다.
 
들뜨고 감격한 마음에 딸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시모노세키항에서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선다. 하지만 입국 거부자 명단에 올라 있다며 거부당한다. "아니 제가 왜 입국이 거부돼요? 이봐요! 전 조선인이에요! 나 조선 사람이라고! 조선인이에요!"라며 미친 듯이 절규하지만 덕혜는 한국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친일파 한택수는 유유히 통과하여 귀국선에 승선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 아닌가. 덕혜는 그 자리에서 미쳐 실성한 듯 고꾸라진다. 갈수록 고구마 백 개쯤이 가슴에 얹힌다.
 
조선 측의 입국 거부로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쇠약해진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서 감금생활을 한다. 어린 나이에 낯선 나라에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해방된 조국에서는 그녀를 찾지 않고... 그 기구함에 마음의 병이 심각할 수밖에.


 

이후 1961년 한일 기본조약회담으로 귀국을 허락받는다. 1962년 38년 만에 그토록 그리워만 하던 고국으로 돌아와 말년을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냈다. 한없이 파란만장하기만 했던 이 땅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정신이 맑던 어느 날 이런 내용의 글을 적었다고 한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덕혜옹주 개인의 비극이기만 한 것이 아니기에 영화가 끝나고도 내내 마음이 아프다. 영화는 픽션이 가미되었지만 그들의 아픔에 쉽게 감정이입이 된다. 시대적 배경이나 장치, 찰떡처럼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드는 영화이기도 했던 ‘덕혜옹주’다.



그중에서도 광복을 맞아 들뜬 마음으로 시모노세키항으로 나와 긴 대기 줄에 선 덕혜옹주와 그 배경이 독특하다. 청주의 옛 연초제조창 동부창고가 바로 그 촬영지다. 1946년에 문을 연 담배공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과 청주대학교 사이의 안덕벌에 위치한 동부창고는 청주 연초제조창이었다. 한때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온 청주를 대표하는 산업체였다. 이제는 7개 동이 남아 공장의 원형을 유지한 채 청주 시민들의 문화 플랫폼으로 탈바꿈되었다. 보존가치가 높은 근대문화유산이다.

 

이곳 동부창고 37동을 입국심사대 세트장으로 구성해 덕혜옹주의 입국심사 장면을 촬영했다. 동부창고의 목조 트러스트가 일제 강점기의 시설을 느낄 수 있어서 촬영지로 선택했다고 한다. 특히 항공샷으로 동부창고 전체가 촬영된 화면은 당시의 시모노세키항이 정말 저렇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다.  



현재 청주의 동부창고는 생활 문화동으로 34동, 35동, 36동, 예술교육 37동, 38동, 커뮤니티. 이벤트 동으로 6동, 8동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누구나 사용 가능한 문화공간이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동아리, 학생, 시민들에게 연습 공간을 제공해 누구나 열린 소통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동부창고로 다가가면 입구부터 벽면의 생동감 넘치는 자유분방한 그라피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어지는 동마다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기다린다. 시민들의 문화공간이며 예술인들의 터전이기도 한 동부창고 덕분에 그곳에 가면 멋진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동부창고를 찾았다면 바로 옆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라는 품격 있는 전시관을 빠뜨릴 수 없다.


 

영화 '덕혜옹주' 덕분에 잠깐이라도 역사 속 왕실 사람들이 세간의 화제가 되는 듯했다.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비로소 그분의 삶이 재조명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덕혜옹주가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창덕궁 낙선재, 특히 그분이 안장된 남양주 홍유릉 뒤편의 작은 묘소에도 간간이 발길이 이어지는 걸 본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가능하고 자동차로 쉽게 찾아가 볼 만하다.


고종과 순종의 능이 있는 남양주 홍유릉 뒤편으로 난 길은 이 지역 사람들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봄이면 길 양쪽으로 벚꽃이 눈부시다. 그 길 따라 멋스럽게 덕혜옹주 묘소로 이어진다. 걷다 보면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재실인 영원이 먼저 나타난다. 곧바로 조선왕조부터 대한제국 시절의 사진이 쭉 전시되어 있다. 걸으면서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덕혜옹주의 탄생과 유년 시절, 강제 일본 유학, 결혼사진, 귀국까지의 사진과 상세한 기록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덕혜옹주 묘지는 소박하다. 묘지 앞의 묘표에는 한문으로 대한덕혜옹주지묘 大韓德惠翁主之墓라고 적혀 있다. 봉분 앞에 간단한 석물이 있고 무심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서 지키는 모습이다. 황녀라는 품격의 신분에서 시대의 흐름 속에 꽃다운 시절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분이 여기 잠들어 있다. 영화나 여행을 통해서라도 덕혜옹주의 궤적을 따라가며 제대로 기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 아닌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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