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얼마 전 '손석희의 질문들'이 5부작을 끝으로 종영되었다. 프로그램이 너무 좋았던지라 남편이 사다 놓은 '장면들' 책이 생각나 읽게 되었다. 사실 손석희 씨에게 내적 친밀감이 있다. 젊은 아빠의 모습과 손석희 씨의 젊은 시절의 외모가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내 키가 동네 슈퍼의 계산대만 했을 때, 슈퍼에 설치된 티비를 보다가 아빠가 왜 티비에 나오지 싶어 뚫어져라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 순간 아빠의 손을 놓쳐 아주 잠깐 덩그러니 혼자였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래봤자 코딱지만 한 동네슈퍼였지만 말이다. 다행히 아빤 내가 나올 때까지 슈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도감이란...
책에는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쓴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심지어 '사족'이라는 섹션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모든 단어, 문장, 문단에는 내용이 치밀하게 들어차있어 빠르게 읽는 건 불가능했다. 역시 그와 많이 닮아있었다.
다시 리뷰로 돌아와 '장면들'에서 내 일인 UX 리서치와 연결해서 공감한 부분을 옮기겠다.
1. 어젠다 키핑
어젠다 키핑이란, 의제를 지켜나가는 것, 선택한 주제를 잊지 않고 계속 보도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JTBC에서 세월호에 대한 보도를 200일 동안 지켜갔던 일도 어젠다 키핑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큰 사건도 잊어버리기 때문에, 아니 잊고 싶어 하기 때문에 어젠다 키핑은 중요하다. 이는 UX 리서치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리서치 후 단지 '@@가 문제예요, ##때문에 사용자들이 어려워해요.'라고 던지고 끝이 아니다. 회사의 우선순위, OKR에 따라 해당 의제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상황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리서처도 안다. 지금 이 안건을 던져도 아무도 귀를 기울일 여력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탈락시킬 수는 없기에 리서치 결과물에 넣는다. 여기에서 리서처의 섬세함과 꼼꼼함, 우선순위가 낮은 결과물을 계속 들려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카테고리 구분과 페이지에서의 UX 문제를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에 집중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일감으로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카테고리에 관한 키파인딩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었기에 나도 해당 문제에 관해 계속해서 이슈화를 시켰고, 관련 결과를 모아서 해당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관한 중요성과 문제를 재가공한 문서를 작성했다. 한 번의 리서치 내용으로는 설득하는데 힘이 부족할 수 있지만(특히 우선순위에 조차 없는 문제라면 더욱) 일관적인 결과를 모으고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다보면 공감하게 만드는 힘이 커지게 된다. 리서처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발굴하여 이해관계자들에게 고객의 이해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수집하여 일감의 우선순위를 높이는 것도 리서처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언론인의 어젠다 키핑은 리서처가 해야 하는 일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느꼈다.
2. 무편향 보다 좋은 편향
손석희 씨가 '뉴스룸'에서 진행할 때 내가 가장 재미있게 봤던 코너는 '앵커브리핑'이다. 책에서는 이렇게 소개했다.
'앵커브리핑'은 주요 이슈에 대한 앵커의 생각을 '대놓고', 그러나 거칠지 않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언론이 '무편향'을 지향하려는 척할 때, '앵커브리핑'은 대놓고 앵커의 관점으로 그날의 이슈를 이야기해 줘서 속이 시원했다. 또 그의 논리력도 배울 수 있어서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뉴스룸'은 다른 뉴스와 차별화된 프로그램이었다. 알랭드 보통 작가가 '뉴스의 시대' 책을 냈을 때 손석희 씨는 뉴스의 방향에 관해 그와 생각이 상당 부분 일치했다고 한다. 작가를 인터뷰한 내용 중 내가 특히 공감한 내용을 옮겼다.
"당연히 '나쁜 편향'도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멀리해야 하죠. '나쁜 편향'보다는 차라리 '편향이 없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편향이 없는 것' 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은 '좋은 편향'이에요."
좋은 편향과 나쁜 편향을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적어도 '상식과 합리'의 차원에서 진실의 추구를 목표로 한다면 편향은 양해받을 수 있다고 적었다. UX 리서처도 단순히 리서치 결과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이트'를 전달해야 한다. 리서처의 생각과 시각이 들어간 결과물이야 말로 이해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고객의 30%가 우리 서비스를 선호한다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리서처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서 만들어낸 리서치 결과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손석희 씨가 뉴스룸을 그만둘 때 '앵커브리핑'에서 해방되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창작의 고통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UX 리서처는 결과물을 낼 때 창작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지금 내가 관찰하고 받아낸 답변 내에서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리서치 밖의 결과물, 예를 들어 관련 논문, 벤치마킹, 이전 a/b 테스트 사례 등등을 접목시켜야 더 나은, 통찰력 있는 복합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쉽게 얻은 결과물은 이해관계자들에게도 쉽게 잊힌다고 생각한다. 리서처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결과물의 깊이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고객의 목소리를 무보정으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 목소리 안에서 그래서 본질적인 메시지를 찾아내는 '좋은 편향'을 위해 리서처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UX 리서처라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단순히 사실만을 전달하고 있는가? 나의 시각이 들어간 인사이트를 전달하고 있는가?
3. 불편한 질문들
세 번째 내용은 '질문들' 프로그램에서 느낀 내용이다. 첫 게스트로 백종원 대표가 나온 날 소상공인, 점주에 관한 불편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보는 나도 이렇게 불편한데 백종원 대표는 어떤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손석희 진행자가 "미안합니다. 계속 가맹점주 입장에서 질문드려서... 사실 미안하진 않습니다. 이게 제 일이라서요."라고 답했다. 백종원 대표도 팽팽한 분위기에서 웃음이 터졌고 나도 그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그 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당당한 자세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리서치 결과를 공유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해관계자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결과물을 읽는 당사자들은 간접적으로 나의 질문을 받게 되는 것이다. 리서치 결과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알게 된다. 이 내용은 누가 불편하게 느낄 것이고, 이건 아마 동의하지 않겠지라고. 하지만 손석희 진행자처럼 당당해지려고 노력한다. 내 일을 하는 것뿐이니 미안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UX 리서처는 이해관계자들의 '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목소리를 전달하여 방향성을 제안하는 사람이니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