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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Sep 14. 2024

투병기

메모장에서 발견함, 2020년 8월


근래는 조금 극적인 변화가 다녀갔다. 약 한 달 가량을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살다, 최근에는 다시 진창에 처박혔다. ADHD 약을 먹기 시작한 것이 전환점이었다. 콘서타 18mg은 그동안의 내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고, 눅눅한 일상이 볕에 내놓은 듯 상쾌하게 말라갔다. 더이상 점심만 먹으면 죽음과 같은 피로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고, 5분 간격으로 머릿속을 뒤덮던 회한이나 쓸모없는 생각에 시달리지 않고 집중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몸에 활기가 돌고, 귀찮아 하던 일들을 선뜻 나서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별 것 아닌 것들이 모여, 사소한 변화를 이끌어 냈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도파민 농도와 집중력에 관한 그래프는 역 U자형 모양이다. 도파민의 농도가 높아지면 오히려 집중력이 떨어진다. 의사 선생님의 처방으로 증량한 약은 오히려 내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근은 마치 약을 먹기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다시 축축 늘어지고,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 되었다. 해내던 것들이 다시 모래알처럼 손틈새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니, 이전보다 더한 상실감이 느껴졌다. 나는 나아지기 위해서 스스로를 아끼고 다독여야 한다. 그렇지만 내게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자신을 칭찬하는 것은 쑥스럽고 새삼스러운 일이고, 이것이 어떻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렇게 힘들수록 나는 더욱 나를 괴롭혔다. 나조차 나를 아끼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아낄 수 있을까. 그동안 고치려고 수없이 노력해왔던 일이지만 다시금 찾아온 절망적인 경험에 나는 쉬운 길을 택했다.

오늘부터는 다시 바뀐 약을 먹는다. 사람이 생물학적 기계라고 늘 생각해왔음에도, 약물에 의해 달라지는 내 모습을 보면 신기한 기분이 든다.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든다. 방법이 있다는 것이니까. 나는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전환점에 섰다. 이를테면 다리가 나은 것이다. 그동안은 늘 내가 게으른 탓이라고 여겨왔지만, 그리고 많은 것들이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려왔지만, 나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어려워 했다. 그저 절뚝거리는 자신을 미워하고 또 미워했을 뿐이다. 그게 편했으니까, 놀랍게도.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솔직히 별로 생각도 나지 않지만, 그저 뿌옇게 안개가 드리운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든 살아온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떻게든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나. 특출한 것이 아니라 괴상한 나. 기이한 나. 그런 와중에 내가 가진 질병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다행이도 나는 약이 잘 들었다. 이제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게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다시 한 번 내게 체력이 돌아올 것이다. 결국 사람은 기계다. 정신은 육체의 부속이고, 화학물질을 통해 이 교묘한 화합물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사한 기분이 든다. 내가 그저 별 것 아닌 살덩어리라는 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이 오고 있고, 나는 좀 더 나아질 예정이다. 오늘은 당장 기분이 썩 괜찮다. 엉망진창인 방구석과 제때 못 한 일들이 남아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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