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제목인 《떼루떼루》는 꼭두각시놀음을 시작할 때 인형 조종자인 대잡이가 시작을 알리며 부르는 노래의 노랫말이다. 표지에 이 단어가 들어가 있으니 '표지를 넘기면 꼭두각시 놀음을 시작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처음에는 '볼로냐 라가치상'이라는 화려한 이름의 상을 수상했다는 이유로 눈길이 갔다. 그러다가 다른 그림책과는 차별화되는 그림체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펼쳐보니 얼쑤 절쑤한 문체에 마음을 주고야 말았다.
《떼루떼루》는 국가무형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놀음' 중 박첨지마당의 네 번째 거리인 '이시미 거리'를 재현한 그림책이다. '꼭두각시놀음'은 조선시대 민심의 저항감을 유머로 승화시킨 무대예술이다. 어딘가 많이 모지라 보이는 '양반'측과 생명력 넘치는 '상놈'측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꼭두각시놀음은 총 두 마당 일곱 거리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떼루떼루》에 담긴 '이시미 거리'가 그나마 순한 맛인 편이라고 한다.
이시미거리에는 '상놈'이 '양반'을 구해주는 스토리가 담겨있다. 양반네가 쩔쩔매는 문제를 상놈인 딘둥이가 한 방에 해결한다. 박첨지네가 '이시미'라는 괴물에게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고 있는데 딘둥이가 등장해 그 괴물을 한 번에 때려잡는 장면을 보고 얼마나 통쾌했을까. 이렇듯 꼭두각시놀음엔 양반 중심의 사회를 전복하고 싶어 하는 백성들의 열망과 생명력이 담겨있다. 다른 에피소드에는 계급갈등뿐 아니라 억압받는 여성의 억울함도 그려내고 있다. 요즘 드라마 작가가 집필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내용들이다.
주류 사회를 전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 담겨 있는, 양반네들이 살아 있었다면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었을,
아이들이 접하기에 다소 거칠어 보이는 이 소재를 그림책화 한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다.
잡(雜)놈.
여러 잡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
그림책, 오토마타 공예, 1인극 공연예술
- 박연철 작가 블로그 자기소개
박연철 작가는 본인을'잡(雜)놈'이라고 소개한다.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가져다 썼다기에 '잡놈'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세다.
인터뷰에서는 이런 말도 남긴다.
부당을 부당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곧장 순응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아요.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글 최혜진 사진 해란
박연철 작가에 대해 알기 전엔 그림책 작가는 모두 코스모스 같은 사람들일 줄 알았다. 이 이후로 마음이 가는 작품을 만나면 작가에 대해 알아보곤 했는데 하나같이 개성 강한 분들이었다. 품고 있는 각양 각색의 에너지를 아이 때부터 읽을 수 있는 그림책에 순한 맛으로 담아낸다. 멋진 직업이다. 이런 이유로 그림책이 아이들 전용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작가들이 쏟아 넣은 에너지는 성인들 이 책장을 넘길 때에도 빛을 발한다.
《떼루떼루》의 주인공은 민중을 상징하는 '딘둥이'다. 딘둥이는 '홍동지'라고도 불린다. 이름처럼 검붉은 피부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생식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알몸이다. 백성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리라.
박연철 작가는 떼루떼루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직접 깎아 만들었다. 꼭두각시놀음의 딘둥이처럼 붉은색 피부를 표현하기 위해 붉은 소나무를 구해 성기까지 표현했으나 출판사로부터 제지당한다. 박 작가는 소신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고 모자이크 처리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저는 그림책이 어린이를 우선하는 장르라고 믿어요. 그래서 어린이를 존중해야 해요. 성기를 가리라고 한 건 어린이를 존중한 게 아니에요. 어린이의 수용 능력과 자정 능력을 믿는 게 존중이지요. ‘어린이라 안 돼’ 그게 바로 어린이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어린이를 존중한다면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해요. 다만 어린이가 이해하게끔 이야기하기가 어렵고, 거기에 작가의 역량이 필요하지요.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글 최혜진 사진 해란
그림책 떼루떼루의 예상 독자는 예닐곱 살의 어린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음란마귀가 인스톨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다. 이 어린이들이 성기를 본다 한 들 어른들이 상상하는 그런 일들은 아이들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 그림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마음이 복잡해질 뿐. 저 모자이크는 생식기를 바라보는 어린이를 관찰하는 어른이 느낄 혼란과 두려움을 방지할 장치였으리라.
이 책에는 딘둥이의 모자이크 처리 외에도 아이들에게 읽어줘도 될까 싶은 것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머리가 새 하얗게 샌 할아버지 박첨지를 향해 "난 영감이 똥구멍으로 말한 줄 알았지"라는 대사를 던진다. 대사만 거친 게 아니다. 박첨지네 식구들은 이시미라는 괴물에게 차례차례 잡아먹히고 그 죽음이 가볍게 묘사가 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죽음을 이렇게 가볍게 전달해도 될까 싶기도 하다.
아이들은 커나가면서 부조리를 수도 없이 경험하게 될 예정이다. 부모님 보호 아래 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비틀린 바깥세상이 아이들이 커서 부모품에서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저항감, 반항심, 전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피어오를지도 모른다. 이럴 때 《떼루떼루》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부정적인 감정을 무조건 내리눌러 없는 것처럼 굴며 삭히다가 속병이 나거나,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섣불리 배출하기 바빠 일상을 위협하는 일 없이 자신만의 표현력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어른으로 커 나가기를 기원한다. 사실 그저 '볼로냐 라가치상'에 끌렸고 입말이 재미있어서 읽어주었지만 이렇게 내 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 내 의도를 잘 포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