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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05. 2021

나도 불행했으면 좋겠다니


  최근 들어 조증이 극에 달해 미친 듯 글을 휘갈기고 있다. (졸업 논문을 이틀 만에 끝냈다). 생각이 머리를 거치는 것보다 손이 키보드를 거치는 게 빠른 경지에 오를 때면 질문을 상상한다. "글 쓰는 능력과 행복을 만끽하는 능력 중, 하나를 택한다면 무엇을 고르겠느냐?" 나는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연 후자를 택할 준비가 되었다.


  요즘은 청소년 소설과 동화를 쓰며 무료 에세이 수업도 병행 중이다. 저마다 철학을 담은 에세이를 하나씩 지니길 바라는 신념으로 임하는데 (굶어 죽을 때가 되면 수업료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써온 글을 읽다 보면 확실히 빛나는 글을 맞닥뜨리게 된다. 문장이 뛰어나서는 둘째고, 경험이라는 재료만으로 다소 미숙해도 눈에 띄게 흡입력이 높은 글이다. 푹 빠져 읽던 중 과거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같은 과거가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기서 '너 같은 과거'라는 뜻은,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을 번갈아 당하거나, 그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져서 초등학생 때 원형 탈모 진단을 받고, 어른이 되어서는 한 연인과 진절머리 나게 몇 백번을 싸우고 헤어지는 과정을 포함한 일이다 (참, 가족도 정상은 아니어야 한다).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지금 무얼 들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느라 반응을 놓쳐버렸다. 분명 화를 내야 했는데, 나는 분노하는 상황에 놓이면 웃으며 못 들은 척하는 능력을 보이기 때문에 그 아이는 여전히 자기가 그런 말을 했는지 꿈에도 기억하지 않을 테다. 사건 이후 친구에게 절교를 선언했으나 아픔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좋아하는 에세이스트님께 이런 질문을 들었다. "어떤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나는 김신지 작가님과 한수희 작가님을 언급했다. 두 분은 씩씩하고 용감하며 재치 있는 글을 쓰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들은 다 재미있고 긍정적인 글을 쓰는 분이구나, 문득 내가 쓴 자질구레하고 지질한 글이 떠올라 한참 고개를 숙였다. 사회생활을 할 때의 나는 분명 친구들을 웃기는 사람인데 키보드 앞에 앉으면 토하듯 아픔을 내뱉었다. 어떤 독자 분은 내게 "생각보다 어두워 보이지 않으시네요."라는 말로 인사를 했다. 아마 나도 어떤 작가님을 만났을 때 비슷한 말을 한 적 있겠지 싶어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은 글 쓸 때의 자아와 집에서의 자아, 밖에서의 자아가 따로 있다. 스물 적의 나는 그 사실을 몰라 작가와 글을 동일시해 글이 좋은 작가는 인성도 좋은 줄만 알았더랬다.


  일 년째 조울증을 앓고 있다. 그래선지 내 글은 유쾌하다가도 금세 어둑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세상에 내 이야기를 내보이고 싶은 결핍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므로, 이제껏 겪은 아픔이 없다면 아마 책 한 권을 쓸 정도의 분량까지는 글을 쓰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성질을 작가라는 직업 전체에 투영한다. 조울증이나 범불안장애를 앓지 않았다면, 동생을 자살로 잃거나 가정 폭력을 당하지 않았다면, 따돌림을 심하게 당해 학교에서 주의 인물로 뽑히지 않았다면 약을 구하는 심정으로 다급하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좋아하는 한 동화 작가님은 "어릴 적에는 놀 게 없어서, 너무 심심해서 글을 시작한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정도 심심함과 결핍이 있어야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가설에 증거가 하나 더 붙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불행을 바라는 건 아니지 않나 싶다. 현대인들이 내과 가듯 정신과를 찾는다고 해서, 정신과를 다니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는데. ADHD나 공황장애를 앓는다 밝히는 이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그 병을 앓아야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닌데 재료에 대한 집착이 지인을 잃게 만드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리다. 특히 문예창작과에 다니는 친구들은 어릴 적부터 글에 대한 재능을 알았고 따라서 욕심도 품게 되었으므로 글에 대한 열망이 큰 걸 잘 안다. 그러나 집착과 욕심은 눈을 멀게 한다. 나는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구독자가 늘고 다음 카카오 메인에 글이 노출되고 책을 내면서 몇 명의 지인을 잃었다.


  오랜 시간 공무원을 준비한 친구가 있었다. 동생을 잃고 슬픔에 잠긴 나는 그에게 만남을 요청했고, 친구는 시험이 끝나고 만나도 괜찮겠냐며 단번에 거절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내게 하루의 시간을 내지 못하는 친구라니. 나는 어른다움을 잊고 집에서 홀로 꺼이꺼이 울었다. 뿐만 아니라, 대인기피증을 앓는다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낯선 이를 데려와 내게 소개한 친구도 있었다. 미래에 현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 친구들과는 다시 우정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다.


  에세이 수업이 끝나고,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왜 저는 우울한 얘기만 쓰는 걸까요." 나도 같은 고민을 겪고 있어서 적당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어물쩍 넘어가버렸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 우울한 얘기를 모두 쓰고 나면 우리가 원하는 밝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예요. 우울한 얘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나도 너 같은 과거가 있으면 좋겠어"라는 이상한 말을 들을 때도 종종 있겠지만, 그런 단점은 훌훌 털고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에 초점을 두면 좋겠어요. 이름 모를 이를 만나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과거를 과거로 흘려보내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원하는 유쾌하고 재치 있고 튼튼한 글을 마음껏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랑스러운 글과 사랑스러운 사람. 애정을 듬뿍 받고 컸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건강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 글은, 왜 글만 쓸 때면 아픈 얘기가 먼저 나오는지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분에게 쓰는 편지다. 아직 아픔이 고여 있어서 그렇다. 눈치 보지 않고 고인 아픔을 방류했으면 좋겠다. 누구야, 어두운 글보다 밝은 글을 쓰면 좋겠어, 넌 왜 이렇게 우울한 글만 써, 라는 얘기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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