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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12. 2021

나이를 시간으로 계산한다면,
내 시간에는 낮잠


  한때 나이를 시간으로 계산하는 법이 유행했다. 스무 살은 오전 여섯 시밖에 되지 않았고, 마흔여섯도 오후 두 시가 채 되지 않았으므로 포기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살라는 말이겠지. 내 나이를 시간으로 환산한다면 오전 여덟 시가 되지 않는다. 아침을 먹고 출근해야 할 시간인데, 나는 도시 생활에 지쳐 귀촌할 만큼 나를 가득 태워냈다.


  날 때부터 부모에게 조급한 성질을 물려받아서인지 달리는 와중에 왜 날지 못하냐는 질책을 했다. 운동을 얼마 하지 않았으면서 왜 살이 빠지지 않느냐 툴툴댔고, 말을 더듬거리지 않는 연습을 하면서 왜 친구를 만날 때도 식은땀을 흘리냐며 좌절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의 적당한 삶을 살지 못하면 차라리 인생을 초기화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심지어 휴식을 위해 제주에 왔는데도 열심히 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과외와 강의를 자원했다.


  어제의 강의에서는 수강생이 직접 주제를 정해 그에 맞는 글을 썼다. 제비뽑기로 뽑힌 주제는 "당신은 제주에서 행복한가요?"이었고, 행복하지 않다고 쓰려는 마음과 다르게 나는 제주가 마음에 드는 이유를 빠르게 쓰고 있었다. 아마도 질문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였지 않았을까. "행복한가요?"가 아니라 "불행한가요?"라고 물어도 "네!"를 좋아하는 나는 어느 질문에든 그렇다고 답했을 거다. 어쨌거나 좋은 질문의 덕으로 행복한 이유를 적을 수 있었고, 이유의 대다수는 사람에게 치이지 않고 쉴 수 있는 여건의 환경이었다. 글을 쓰며 작년 말에 써둔 일기장이 자꾸 생각나 집에 오자마자 메모를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닳고 헤진 연필로 쓱쓱 힘을 주어 적은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서울에 있으니 불안장애가 더욱 심해진다. 특히 지하철을 탈 때나 거리를 걸을 때, 마스크 때문에 불편한 건 둘째치고 사람들에게 끼어 있는 상황이 무섭고 두렵다.

친구로 외로움을 해소하고 싶지 않다. 예전에는 원룸에 혼자 살아도 친구들을 만나면 괜찮아졌는데,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하니 더욱 외로워져 통화 기록은 내가 걸다 만 전화 투성이다.

사랑에 빠지기 싫다. 이별의 아픔을 더는 겪고 싶지 않다. 아무도 없는 곳에 있으면 아무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겠지.


  마지막 이유를 보고 내가 언제 이런 이유를 적었담 싶어 킬킬댔다. "아프면 쉬자"라고 말해 놓고는 치료를 위해 온 본가에서 사람인과 워크넷을 반복적으로 누르는 현실의 내게 미안해졌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날 위해 푹 쉬라고 제주로 보내 놓은 걸 텐데, 여기서까지 스물여섯 살이 해야 할 지침을 곱씹으며 지금은 쉬지 말아야 할 때라고 소리쳤다. 다른 애들은 지금 입사하고, 전문직을 준비하고 있는데 넌 아직도 토익이나 하고 있어? 그것도 넷플릭스가 토익 공부라고?


  인생의 꿈이 하나 있다면 책을 내는 거였는데, 올해 꿈을 이뤘으면서 기억을 초기화하는 습관은 끝내 버리지 못했다. 생각보다 책이 잘 팔리지 않으니 다음 책을 내서 나를 알려야 한다며 끙끙댔다. 숨 가쁜 도시생활에서 벗어났으나 오히려 약물의 수는 늘어갔다. 어느새 나는 한 알이 아닌 한 움큼의 약을 먹고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일하는 엄마 아빠 사이에서 한창 돈을 벌어야 할 나이에 놀고 있냐는 무시를 받을까 늘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이와 관계없이 치료를 목적으로 지내야 하는 상황임을 깨달은 나는 오늘 아침밥을 먹고 여덟 시에 낮잠을 잤다. 우연하게도 인생을 시간으로 계산한 내 나이와 비슷한 시간이었다. 일곱 시 오십 분, 이불을 덮으며 생각했다. 푹 자야겠다고.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는 게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어떤 시간에 살고 있는지는 모두 다르지만, 낮잠이 필요한 시간도 저마다 다르니까. 누군가 출근을 위해 문을 나서는 시간에, 나는 그저 눈을 감고 이불 안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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