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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13. 2021

덜 자유로운 상상


아빠가 집을 나갔다. 다른 가족이라면 아빠의 행방을 찾아 나섰겠지만 우리 가족은 손수 비행기 표를 끊어주었다. 혼자 비행기를 탄 건 이십 대를 제외하고는 없는 그에게 공항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은 건 내가 마침 강의에 열중하던 때였고, 그래서 나는 별 의문 없이 무슨 일이 있어 떠났구나 추측만 할 뿐이었다. 평소 나는 아빠가 하루빨리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바라던 바가 아닌가 하는 속마음이 들었다. 신기하게 그 생각에 아무런 죄책감이 들고 있지 않았던 걸 보면 그가 가족의 신임을 얼마나 잃어버렸는지 보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남동생의 말을 빌려 아빠가 나가게 된 정황을 살펴보니 예상보다 큰 다툼을 했더란다.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알리기 어렵지만 뻔히 막내가 방에 있는 걸 알면서 "난 지금도 죽고 싶어"라는 말이나 "둘째 딸을 잡아먹은 건 우리야!"라는 외침을 간간히 뱉었다고 한다. 나는 머리가 아파왔고 도대체 저 소년과 소녀는 언제쯤 철이 들지 삭신이 쑤셔왔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리만큼 얽매여 사는 이들이었고 다짐에 맞지 않게 우리를 괴롭히는 이들이었다. 나는 남동생의 입에서 나오는 그들의 발화를 들으며 한 뼘 더 늙었다.


아빠는 자신이 집을 나간다고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건조기의 물을 빼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라 요구했고 나는 알겠으니 전화를 끊어도 되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차피 그는 내 앞에 없었으므로 나는 조금 더 당당하게 전화를 끊었다. 최근에 남동생과 내가 신나게 놀고 있는 와중에 시끄럽다며 진심을 담아 욕을 해대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얼른 시간이 멀리멀리 달아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또 했다.


아무리 전문 상담사여도 상대방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상담 횟수는 한 달에 한 번씩으로만 잡았다. 그마저 자살 유족 치료비 지원 사업이 없었더라면 받지 않을 상담이었다. 선생님은 요즘 생각이 어떠느냐 물었고 나는 나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놀라며 나쁜 생각이라고 하면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타일렀고 나는 절대 나를 해치지 않으리라고 말하며 선생님을 안심시켰다. 그건 사실이었다. 내게 있어 나쁜 생각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 쪽의 상상이었다. 그저 시간이 많이 흘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족이라고는 동생과 나만 남아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답으로 상담을 끝냈다. 너무 솔직하게 답한 나머지 심장이 커다랗게 요동쳤다.


일주일 정도만이라도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딱 좋으련만 아빠는 오늘 오후에 비행기를 타고 다시 제주로 내려온다. 나는 다시 그를 밝게 맞고 우리는 다시 정상 가족의 궤도에 진입하고자 애를 쓰며 참외를 깎겠지. 이제 참외씨는 먹으면 안 돼, 먹으면 배가 아플지 모르니까. 배탈 날지 모른다는 걱정을 접어둔 채 조금 덜 경계하며 참외를 먹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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