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은 반절만 믿어줘. 그게 나을 거야. 나는 너를 지킬 힘이 없거든. 심지어 기억도 흐릿해. 물론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분명 모두 진짜라고 믿고 털어놓지만, 이 얘기를 들은 네가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전한대도 나는 그 말의 증거를 하나하나 들이밀 자신이 없어. 뇌과학자가 그런 말을 했어. 어린 시절에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은 독이 든 캡슐을 먹고사는 거라더라. 독이 든 캡슐을 먹은 사람이 얘기한다고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이상하지. 너는 똑똑하게 내 말을 들었는데 정작 나는 그 똑똑함을 명료하게 복기하지 못한다는 게. 그래도 조금만 이해해 줘. 너도 알겠지만, 우리에게 닥친 기억을 빠짐없이 각인시킨다면 결코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을 거야. 과거에 단단히 묶인 사람은 구출하기 어려우니까.
밖에서 보는 나는 그럴듯해. 어린 나이에 많은 걸 이룬 것처럼 보이거든. 물론 넌 나라는 존재를 처음 마주쳤을 수 있겠지만. 나는 책을 여러 권 썼어. 어딘가 소설을 올리기도 했어. 돈을 벌기 위해서 쓰고 싶지 않은 글도 많이 써. 안에서도 밖에서도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야. 말을 못 하거든. 더듬거리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말하기 대회에 나가기도 했어. 그래서 밖에서 보면 몇몇은 나보고 반짝인대. 흩뿌려진 생각이나 상황을 말과 글로 빠르게 정리할 수 있어 부럽대.
있잖아. 내가 글과 말을 배운 이유가 뭔지 알아? 넌 나를 처음 보니까, 나를 만나고도 일 년 뒤면 나를 잊을 테니까 얘기해 볼게.
기대는 하지 말아. 되게 웃기고 유치한 일이거든. 경찰이 내 말을 믿어줬으면 했어. 아빠가 나와 동생을 목각으로 때리고, 엄마가 그런 적이 없다고 중간에서 시치미를 뗐을 때, 내가 열여섯 살이라는 이유로 내 말이 묵인됐거든. 내가 아이들을 만났을 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이유도 사실 이때의 기억 때문이야. 아이들은 어리지 않아. 너도 잘 알지. 아이들은 다 알아. 간극 사이의 상황도 눈치 빠르게 알아차려.
경찰이 내 말을 무시하고 엄마의 눈높이만 맞추며 대화할 때, 그리고 경찰차가 사라질 때, 그런 결심을 했어. 국문학과에 가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한글을 잘 가르치기로 유명한 학교에 가면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나는 배웠으니까. 어른들이 요구한 것처럼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말도 잘 따라서, 조그만 사고도 부리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을 정도의 착한 일만 해서 대학교에 들어갔으니까. 궁금하지. 국문과를 다닌 뒤의 내 말은 경찰들이 잘 들어줬을까. 답은 아직 모르겠어. 반쯤은 들어줬고, 반쯤은 듣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반이라도 들어주더라. 학과 덕분은 아니었어. 글과 말을 곱씹고 정리해 분명하게 표현한 연습을 수도 없이 한 덕분일 거야.
못된 일이 거기서 끝났으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 후로도 나는 슬픈 일을 겪고 있어. 아픈 일을 당하면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 저 사람이 그랬어요,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대했어요. 못돼 먹은 사람에게는 못되게, 착하고 다정한 사람에게는 섬세하게 대하는데 이 방식이 오히려 나를 극단으로 치닫게 해. 언젠가 한 상사는 퇴사하는 나에게 그런 말을 했어. 당신은 작가 기질이에요. 고분고분 따르지를 않아요. 그때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회사를 대여섯 번은 옮겼어. 그 말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어서. 설령 그가 듣지 못한대도. 대기업부터 스타트업 할 것 없이, 병원이나 미술관도 가리지 않고 여러 일을 했는데 말이야. 오늘 결론이 났어. 맞아. 나는 회사에 다닐 만한 체질이 아니야.
불합리함과 비효율로 점철된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 참을성만 기르는 게 답이라면 꾸역꾸역 다니기라도 할 텐데, 저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면 수입이 끊긴대도 내 가치관을 고수하고 싶어.
내 퇴사 이유는 다 이런 거야. 일하다 멀티탭에 실수로 커피를 쏟아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동료에게 휴지도 가져다주지 않고 비꼬며 웃는 어느 사람, 내가 쓴 글에 적확한 피드백 없이 그저 다시 써 오라는 사람, 담배 연기조차 힘들어하는 나를 흡연장으로 데리고 가서 동료들을 소개해준 사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할 마음이 들지 않아 나갔어. 매일 모두를 탓한 건 아니야. 타인은 바꿀 수 없지만, 적어도 나의 영역만큼은 바꿔볼 노력은 할 수 있으니까.
이렇다 할 결론이 없네. 할 말이 너무나 많으면 아무런 말도 하기 어려워. 글과 말을 배워도 여전히 그래. 경찰이 내 말을 들어줘도 그래. 나의 섬에 고립된다면 비로소 내 말은 모두 진실이 되겠지. 섬에는 나의 두 귀만 남아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