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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가정’이라는 신화

by 석은별

나는 어린 시절부터 '보통의 가정'이라는 글자 앞에서 종종 멈칫했다. '보통의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이라는 수식어는 내 심장 어딘가를 콕콕 찌르는 동시에, 내가 간절히 갖고 싶던 따뜻한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상, 저녁마다 가족이 한데 모여 TV를 보는 풍경, 부모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정하게 웃는 장면. 그 모든 것이 내게는 한 편의 동화였다. 학교 도덕 교과서의 삽화에만 존재하는, 닿을 수 없는 세계.


내가 자라던 집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평화가 아니었다. 말이 사라지고 침묵이 텅 빈 공간을 채웠다는 뜻이었다. 그 안에서 웃음 대신 숨소리가 섞였고, 말 대신 무거운 눈치만이 오갔다. 나는 늘 그런 공간에서 결핍의 모양을 관찰하는 아이였다. TV 속 가족들이 싸우고 화해하며 매듭을 지을 때, 우리 집의 갈등은 언제나 차갑고 긴 침묵으로 마감되었다. 나는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우리 집은 저렇게 끝나지 않을까." 이 질문은 어린 나를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렀다.


그래서 나는 '보통의 가정'을 하나의 완벽한 신화로 굳게 믿었다. 그곳에서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고 자라며, 부모는 서로를 존중하고, 저녁마다 다정한 목소리가 오갈 것이라고. 이 신념은 나에게 위안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불행하게 하는 족쇄가 되었다. 그 믿음이 존재하는 한, 나는 영원히 '비정상적인 가정의 잔여물'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조금 가까워질 때면, 늘 같은 질문이 무심히 던져졌다. "넌 가족이랑 사이 좋아?" 이 단순한 한마디는 내게 폭탄처럼 다가왔다. 나는 잠시 웃고는, "응,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그 '괜찮다'는 짧은 말 속에는 수백 개의 문장이 숨어 있었다. '괜찮아야 할 것 같아서.'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은 나를 보호하는 방패인 동시에, 내 안의 진실을 더 깊숙이 묻어버리는 삽이었다. 나는 언젠가 진짜 괜찮아질 거라 믿으며 입을 다물고, 조용히 연습했다. '보통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연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그 연습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내 가족을 이루면 비로소 나도 '보통의 가정'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일은 마침내 내가 '정상'으로 복귀하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제도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긴장 속에 갇혀 살았다.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조율했고,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연기, 평범한 집을 연출하기 위한 끝없는 리허설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보통의 가정'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사회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집단적 판타지였을 뿐이다. 세상 어느 집이든 사랑과 상처가 공존하며, 그 안에는 견딤과 후회, 그리고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보통의 가정'이란, 사실 서로의 결함과 상처를 기꺼이 덮어주는 힘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어린 나는 그 신화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안심했다. 언젠가 그 세계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 그 단어를 들으면 오히려 불편해진다. 그 허상이 너무 많은 사람을 고립시키고, 서로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보통의 가정'은 누구에게는 간절한 이상이지만, 누구에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다.


그 견고한 틀 안에서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며 스스로의 삶을 재단당한다. 나는 '보통의 가정'을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화의 허상을 누구보다 일찍 깨달은 사람이었다.


완벽하게 평범한 삶은 없다. 다만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품은 채 하루를 견디고, 서로를 이해하며 유지해 나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식탁에서 따뜻한 국 한 숟갈을 떠먹는 순간에 감동한다. 그 평범한 장면이 내게는 여전히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결핍을 안고 하루를 살아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나는 '보통의 가정'이라는 환상을 좇아 달려가던 사람이 아니라, 그 실체를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 이해는 화려하지 않았으나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이제 나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만의 정직한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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