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착해 보인다’는 말을, 어른이 되어선 ‘잘 웃는다’는 말을, 중년에 가까워지니 ‘푸근하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나는 늘 같은 사람이다. 착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은 아이.
어릴 때부터 나는 착해야 했다. 착하지 않으면 곁에 머물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꼈다. 어른들의 표정을 읽고,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며, 나의 몫을 줄여 다른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건 성격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
착함은 내게 정체성이 아니라, 지구별 거주 허가증이자, 평범함의 상징이었다.
착한 아이는 먼저 요구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걸 고르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은 것을 집어 든다. 줄을 설 때 맨 앞보다 뒤를 택하고, 누가 급해 보이면 자리를 내어 준다. 그 작은 양보들은 착함의 증거였고, 동시에 나의 존재가 덜 부담스러운 사람으로 분류되는 티켓이었다. 나는 그 티켓을 늘 소지했다. 어디서든 쫓겨나지 않으려면, 유순함이 유일한 통화가 되어야 했다.
노트의 첫 장은 언제나 반듯했다. 선생님이 칭찬해 주는 그 한 줄의 반듯함이 나를 잠시 안전한 곳에 올려놓았다. 숙제를 빠짐없이 내고, 떠들지 않는 아이. 선생님이 교실을 비우면 친구들을 조용히 타이르던 아이. 그런 아이는 어른들이 좋아한다. 나는 그 **‘좋아함’**을 식별하는 법을 일찍 배웠다. 좋아함은 곧 머무름의 허가였으니까.
하지만 착함에는 대가가 있었다. 그 대가는 언제나 조용히 청구됐다. 배가 고파도 참는 일, 억울해도 설명하지 않는 일, 상냥한 미소로 마음의 문을 닫는 일. 누군가에게 맞추느라 생긴 균열이 내 안에 촘촘히 늘어났다. 그 균열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밤에 불을 끌 때 쓸쓸함이 커졌다. 침대에 누워 “오늘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묻다 보면, 온종일 남의 마음만 들여다보고 내 감정은 한 줄도 기록하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다.
착함은 관계를 매끄럽게 하지만, 나를 흐릿하게 만든다. 타인의 요구를 먼저 듣는 게 미덕이 되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점점 알 수 없어진다. “괜찮아요.”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그 말 뒤에는 수많은 생략이 매달렸지만, 머릿속 스피커는 늘 시끄러웠다. 정말 괜찮은지,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 어떻게 해야 괜찮아질 수 있는지— 그 질문들이 내 안에서 쉬지 않고 떠돌았다.
착한 아이는 갈등을 두려워한다. 갈등이 나를 위험한 곳으로 데려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가 무례할 때에도 먼저 웃었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나 봐요.”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탓하면 상황은 빨리 정리된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는 게 있었다. 내 안에 쌓이는 작은 분노의 퇴적층.
그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릴 때가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닌 사건 앞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부서지는 순간— 그때마다 나는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지?” 사실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나를 오랫동안 소비하면서 살아왔다.
착함은 때때로 권력이 된다. 나는 그 사실이 더 두려웠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관계의 방향을 정한다. 모두가 그 말에 기대어 안심한다. 그때부터 나의 착함은 주변을 안정시키는 장치가 되었다. 문제는, 아무도 그 장치의 유지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계속 전기를 공급했고, 결국 내 배터리는 알람 없이 방전되곤 했다.
착함과 좋은 사람됨은 다르다. 좋은 사람은 경계를 세울 줄 알지만, 착한 사람은 경계를 지우며 살아남는다. 나는 오랫동안 후자의 방식으로 살았다. 그래서 ‘싫다’는 말을 미뤘고, ‘그건 어려워요’라는 문장을 입안에서 굴리다 삼켰다. 삼킨 문장들이 몸을 돌 때마다 이유를 모른 채 피곤해졌다. 그 피로가 쌓이면 삶은 어느 날 문득 무의미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차분한 대학 동기가 말했다. “다음에는 네가 하고 싶은 걸 말해봐.” 그 말이 이상하게도 두려웠다. 하고 싶은 걸 말하는 건,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한 가지 말했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내 선택을 궁금해했고, 일부는 기꺼이 따라 주었다. 그날 나는 배웠다. 착함이 아니라 ‘선택’이 관계를 성숙하게 만든다는 것을.
지금도 나는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다만 그 친절은 더 이상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나를 존중하는 데서 흘러나오는 여분이어야 한다. 남을 위해 내 경계를 지우는 친절은 결국 두 사람 모두를 약하게 만든다. 경계 위에서 건네는 친절만이 서로를 단단하게 한다.
거절은 배신이 아니라, 관계의 내력 설계다. “나는 여기까지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내가 건네는 ‘괜찮아요’도 비로소 진실해진다.
가끔은 여전히 옛 습관이 나를 잡아당긴다. 상대의 표정을 먼저 살피고, 내 의사를 마지막으로 미루는 마음. 그럴 때면 나는 내 안의 작은 아이에게 말한다. “이제 네가 먼저 골라도 돼. 먼저 고른다고 사랑이 줄어들지 않아.”
그 말은 주문처럼 느리게 몸에 스며든다. 나는 그 주문을 외우며, 오랫동안 나를 지켜 주었지만 동시에 나를 지워 버리던 착함의 가면을 조금씩 벗는다.
그 시절의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 시간 덕분에 나는 많은 관계에서 버틸 수 있었고, 상대의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착함으로 살아남은 자리에서 나로서 살아가는 자리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을.
그 옮김은 요란하지 않다. 밥을 먹을 때 내가 먹고 싶은 반찬을 먼저 집는 일, 피곤한 날 약속을 미루는 일, 싫은 농담에 웃지 않는 일처럼 소소하다. 그 사소함이 모여 내 삶의 새로운 기준선을 만든다.
나는 여전히 친절하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착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착한 아이로 살아남던 사람은, 이제 괜찮은 어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된다.
그 어른의 문장은 짧고 또렷하다. “나는 여기까지.” 그리고 그다음 문장은, 더 다정하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