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말을 잘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어쩌면 그 시작은 아주 어릴 적, 할머니 곁에서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심스레 말을 보태던 그 풍경을 오래 지켜본 덕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필요한 만큼만 덧붙이는 법. 그때 익힌 리듬은 내 말의 가장 원초적인 주파수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몰랐다. 그 능숙한 ‘말하기’를 위해 내가 얼마나 민감하게 주변의 기류를 살피며 정보를 모으고 있는지를.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기본이었다. 어색하지 않게 웃고,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원할 만한 공감의 리액션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주제가 사적인 감정보다 과제, 절차, 방법 같은 정보일 때 나의 말은 특히나 매끄러웠다. 학교에서 전달사항을 정리해 알려주거나, 숙제 방법을 설명하거나, 모르는 문제를 풀이할 때—그때의 말은 곧 실력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능숙한 말하기일수록, 정작 내 안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정보가 가득한 말을 하는 '나'와, 내 감정이나 생각이 스며드는 순간 말하는 '나'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내 생각을 말해야 할 때면 온몸이 먼저 경직되었다. 어깨는 갑옷처럼 올라붙고, 숨은 얕아졌다. 그리고 모든 대화를 마치고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오래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막 올라온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에게 대화는 늘 작은 시험이었다. 단어 하나, 표정 하나, 타이밍 하나에 따라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다’거나 ‘예민하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신중했다. 말을 꺼내기 전, 마음속에서 서너 번 연습했다. 이 말을 해도 될까? 상대가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대부분의 결론은 늘 같았다. "그냥 말하지 말자."
집안의 공기는 자주 바뀌었다. 아빠의 기분이 불안정해지는 순간, 방 안의 온도와 소리가 먼저 변했다. 그 미세한 변화를 읽어내는 일은 나의 생존 감각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말의 내용보다 기류를 먼저 듣는 아이가 되었다. 말이 던져지는 순간의 표정, 목소리의 떨림, 빠르기, 숨 고르기—문장 뒤에 숨어 흐르는 감정을 먼저 포착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발달시켜야 했던 감지력이었다.
문제는 그 능력이 너무 예민해졌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주 잠깐 흔들리기만 해도, 나는 이미 상대의 마음을 추측하고, 해석하고, 조심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사이를 건너다 보면, 대화가 끝났을 때 내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상대의 감정을 끝까지 들여다보느라, 정작 내 감정이 어떤 색이었는지 잊어버린 것이다. ‘보통의 대화’는 어느새 나에게 '나를 비우는 의식'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잖아." 하지만 나에게 솔직함은 위험의 다른 이름이었다. 솔직한 말은 사람을 멀어지게 할지 모른다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 관계가 깨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정제된 문장을 골랐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저는 다 좋아요."
이 문장들은 다정해 보였지만, 사실은 내 불안을 감추는 단단한 사회적 포장지였다. 대화는 늘 불균형했다. 상대는 편안했고, 나는 피곤했다.
나는 듣는 사람으로 남기를 택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 듣기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목소리가 사라진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나?" 그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내 안에서 언어의 씨앗이 마르고 있음을 느꼈다.
어느 날, 한 지인이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니?"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게, 나를 지켜준 방식이었거든."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세상과 대화하기보다, 사실은 세상을 달래며 살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달래기의 습관'이 나를 오랫동안 고립시켰다는 것을.
지금도 나는 말이 쉽지 않다. 그러나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이제는 대화를 잘하는 사람보다, 진심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상대의 마음을 맞추려 애쓰기보다, 내 마음의 떨림을 먼저 듣는다. 말을 억지로 삼키지 않고, 때로는 서툰 표현으로라도 조심스레 꺼내 본다. 그 말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서툼이야말로 진짜 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돌아온 끝에 알게 되었다. 보통의 대화란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읽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불안이 공존하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말이 완벽하지 않아도, 침묵이 잠깐 흘러도, 그 사이에서 서로의 온기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대화다.
나는 여전히 말을 아낀다. 그러나 이제는 두려움이 아니라 선택으로.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조금씩 말할 수 있어서 괜찮다.
완벽한 대화보다, 진심이 있는 대화. 그것이 내가 새롭게 배운, 보통의 대화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