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결혼,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인 평범함

by 석은별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나는 사랑이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과 있으면 안정적일 거라 믿었다.
사랑은 곧 안정을 데려오는 평화의 사신처럼 보였다.
결혼은 그 평화를 얻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남들처럼 사는 일, 그게 내가 꿈꿔온 평범의 완성이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누군가의 가족이 된다는 건 오랫동안 닿지 않던 ‘정상’의 세계에 입성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드디어 ‘보통의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결혼식 날, 나는 한껏 움츠린 어깨로 억지로 웃고 있었다.
스물네 살의 나는 사진 속에서 여전히 얼어붙은 학생 같았다.
이제와 그 사진을 보면 속으로 말해 준다.
‘마냥 좋을 거라 믿고 싶었지. 하지만 몸은 두려웠구나.’

‘이제 나도 내 편이 있어!’
그때의 나는 내 편을 찾아 떠나는 것이 결혼이라 믿었다.
누군가 옆에 있는 한, 외로움은 옅어질 거라 여겼다.
처음엔 정말 안도했다. 하루 세 끼를 챙기고, 함께 잠들고, 아침을 맞는 일이 공유된다는 사실 자체가 안정이었다. 마침내 ‘보통의 일상’을 손에 넣은 듯했다. 그러나 그 안정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일상에서 마주한 것은, 내가 안다고 생각한 사람의 ‘모르는 모습’들이었다. 예측 가능할수록 숨이 트일 줄 알았는데, 예측 불가능한 단면들이 오히려 목을 조여 왔다.


우리는 많이 다퉜고, 그만큼 많이 대화했다.
때로는 설득이 압박으로, 배려가 통제로 바뀌기도 했다.
애쓰고 애써 어느 날부터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표면적으로는 평화였다. 그러나 그 평화는 더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선택한 침묵 위에 세워진 질서였다. 배려는 습관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고, 참음이 사랑의 증거가 되었다. 그렇게 참는 동안, 조금씩 ‘나’의 언어가 사라졌다.


초기에 가장 자주 들은 말은 “고맙다”였다.
그 말은 따뜻했지만, 이상하게도 관계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감사의 말이 쌓일수록 보이지 않는 빚이 눌러왔다.
서로에게 고마움을 건네면서도 정작 진심을 건너뛰는 날이 많아졌다.
‘고맙다’는 말은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었지만, 마음의 물길을 막는 얇은 벽이 되기도 했다.


나는 늘 안정적인 아내, 사랑받는 사람, “괜찮은 배우자”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은 오래도록 나의 자존감의 근거였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그 기대를 ‘평생의 약속’으로 고정한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함께 사는데, 함께 살아 있는 느낌은 줄었다.
‘함께 있음’ 속에서조차 나는 투명해졌다.


돌이켜보면, 결혼은 나에게 두 번째 평범의 훈련장이었다.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범을 배웠다면, 결혼 안에서는 평범을 ‘유지’하는 법을 익혔다.
관계를 지키는 법, 감정을 관리하는 법, 대화 대신 침묵으로 균형을 맞추는 법.
하지만 그 유지의 기술은 어느 순간 소통의 소멸로 이어졌다.
평화를 원했지만, 그 평화는 나의 윤곽을 지워 갔다.


어느 날, 남편이 물었다. “넌 요즘 무슨 생각해?”
나는 잠시 멈칫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조차 희미했다.
그제야 알았다. ‘평범한 아내’라는 역할에 몰입하느라 내 안의 결을 오래 방치해 왔다는 것을. 누군가의 하루를 돌보면서, 내 하루의 리듬은 점점 흐려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결혼을 통해 얻은 것은 안정이라기보다 거울이었다.

그 거울은 나를 끝없이 비추었다.
내가 얼마나 조심하며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은 ‘괜찮음’으로 나를 덮었는지, 얼마나 진심보다 평화를 우선했는지. 결혼은 평범의 끝자락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묻는 통로였다.


이제 나는 안다. 결혼은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서로를 포용하는 일만큼이나 각자의 세계를 인정하는 일이다.
함께 있어도, 각자 설 수 있는 힘.
그 힘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평범한 관계가 가능하다.


나는 여전히 결혼 생활 속에 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을 통과의례로 여기지 않는다.
결혼은 내가 평범해지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장이다.
오늘의 결심은 단순하다.

침묵으로 질서를 세우기보다, 작은 말로 리듬을 세우기.
고마움으로 빚을 쌓기보다, 진심으로 물길을 트기.
서로의 다름을 견디는 연습을 멈추지 않기.


사랑은 결국, ‘우리’라는 품 안에서 너의 자리와 나의 자리가 함께 또렷해지는 경험이다. 그 경험을 향해, 나는 천천히—그러나 확실히—걸어가고 있다. 오늘의 우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평화롭다.
괜찮다. 충분하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0화사랑받는 사람의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