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인가 ‘정상’, ‘건강’이라는 단어 앞에서 긴장했다. 그 단어에는 늘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을 넘어서면 이상했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부족했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어느 방향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중립의 예의를 지키며.
사회는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렬시킨다. 정상적인 가정, 정상적인 커리어, 정상적인 인간관계. 건강한 정신, 건강한 신체는 마치 ‘보통의 삶’의 대명사 같았다. 그 정렬된 틀에 들어가야 ‘문제없는 사람’이 된다. 나는 오랫동안 그 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보통의 집, 보통의 대화, 보통의 직장, 보통의 관계. 그 ‘보통’이라는 말이 내게는 곧 안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예의 바른 사람이 되려 했다. 상황에 맞는 말투, 표정, 행동. 감정은 정리된 뒤에야 꺼냈고, 불만은 돌려 말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일, 그게 곧 ‘정상적인 사람’의 예의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예의는 나를 병들게 했다. 정상에 대한 예의는 항상 두려움의 언어로 쓰였다. 한 번 삐끗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봐, 감정을 드러내면 ‘감정적인 사람’이라 불릴까 봐, 내 안의 진심을 계속 포장했다. 표현 대신 판단을, 진심 대신 계산을 앞세웠다. 그렇게 내 안에서 ‘자연스러움’은 점점 사라졌다.
직장에서, 모임에서, 심지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나는 늘 ‘적당한 사람’으로 머물렀다.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다른 사람의 감정선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정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그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한 자기검열’이었다. 정상은 나에게 자유가 아니라 감시였다.
결혼 후에도 그 감각은 이어졌다. 주변 사람들은 늘 말했다. “은별 씨는 참 안정적으로 보여요.” 그 말은 칭찬 같았지만, 나는 그 말에 갇혔다. ‘안정적’이라는 단어는 내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그 안정은 내가 만들어낸 연극의 무대였다. 나는 내 삶을 늘 연출해야 했다. 불안하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정상으로 보이도록.
그러나 정상이란 말은 늘 불안정 위에 세워진 균형이었다. 누구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그 애씀의 끝에는 늘 피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할 때조차 괜찮은 척했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건 사소한 일’이라며 눌러버렸다. 감정은 점점 압축되고,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작은 폭발음이 났다. 눈물도, 분노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울컥함. 그건 아마도 오래된 억눌림의 울음이었다.
그즈음 ‘건강’이라는 말도 낯설어졌다. 수면 시간, 걸음 수, 심박수, 체지방률—숫자로 환산되는 건강은 편리했지만, 내 몸의 리듬과는 자주 어긋났다. 숫자가 좋아도 하루가 무너질 때가 있었고, 수치가 나빠도 마음이 단단한 날이 있었다. 나는 알게 되었다. 건강이란 ‘정상 범위’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라, 변동을 견디는 회복의 기술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정상이라는 단어는 정지의 상태를 요구한다는 걸. 변하지 않아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변하고 흔들린다. 그 자연스러운 파동을 거부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생기를 잃는다. 나는 정상으로 살아남기 위해 내 안의 생동감을 포기했던 것이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산다. 이상해지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감정이 요동치면 그것대로 흘러가게 둔다.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이상하게 보일 용기가 생기자, 오히려 마음은 훨씬 안정됐다. 정상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흔들림을 견디는 힘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예의를 새로 배운다. 누군가에게 맞추는 예의가 아니라, 나에게 정직한 예의. 때로는 예의 없이 솔직해야 할 때도 있다. 쉬어야 할 때는 쉬고, 모른다고 말해야 할 때는 모른다고 말하고, 도움을 청해야 할 때는 도움을 청한다. 회복을 미루지 않는 태도, 이것이 내가 새로 정의한 ‘건강의 예의’다.
나는 더 이상 정상처럼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살아 있는 쪽을 택한다. 균형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배우는 법—쉬는 법, 멈추는 법, 다시 시작하는 법. 그 반복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정렬된 틀은 여전히 불안하지만, 그 불안 덕분에 나는 비로소 나답게 흔들릴 수 있게 되었다.
정상은 기준이 아니고, 건강은 성적표가 아니다.
정상은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건강은 ‘리듬’을 회복하는 능력이다.
오늘도 나는 내 자리에서 내 리듬을 고른다. 완벽한 수치 대신 충분한 숨, 모범답안 대신 솔직한 한 줄. 괜찮다. 이 리듬이면, 오늘을 살아내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