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면 내 삶은 언제나 단정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일정한 일과를 지켰다. 밥을 짓고, 일을 하고, 집을 정리하고, 누가 봐도 ‘평범하게 사는 사람’의 하루였다. 하지만 그 단정한 표면 아래에는 늘 하나의 비밀스러운 층이 존재했다. 아무 일 없는 하루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감정과 생각을 숨겨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감추는 법을 잘 배운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그건 살아남는 기술이었다. 집안의 공기가 어두워질 때마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얼굴을 조심스레 조정했다. 누군가가 화를 내면 내 표정이 그 감정을 비추지 않도록 긴장했고, 아무 일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누군가 울면 같이 울지 않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져도 눈물을 흘리는 순간 일이 커질 거라 여겼다. 감정을 드러내면 일이 커졌고, 감춘 채 지나가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그 패턴은 어느새 몸에 새겨졌다.
사소하게라도 내 감정을 드러내면 나는 그 표현에 대한 대가를 꼭 치러야 했다.
할머니가 떠난 후, 누군가가 나를 대신 지켜주는 일은 사라졌다. 오
히려 새엄마와 동생들은 나의 감시 카메라처럼 굴었다. 조금만 표정이 어두워도 “왜 그래?” “또 뭐 문제 있어?” 그 말들이 마치 심문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내 감정을 들키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시절의 습관은 오래 남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비밀로 일상을 정리하는 사람이다. 비밀은 나를 보호해줬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었다.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정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그건 배려의 말 같았지만, 사실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었다. 진심을 말하면 상황이 꼬일까 봐, 내 탓으로 또 다른 일이 생길까 봐, 나는 언제나 중간쯤에서 멈췄다. 그 멈춤이 쌓여서 내 안엔 미완의 감정들이 층처럼 쌓였다.
그 미완의 감정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새어 나왔다. 혼자 있을 때 갑자기 눈물이 흐르거나, 밤에 잠이 오지 않거나, 아무 일도 없는데 피곤함이 몰려왔다. 몸은 정직했다. 숨기면 숨길수록 신호를 보냈다. “이제 그만 좀 감춰도 돼.” 하지만 나는 그 신호를 무시했다. 괜찮은 사람으로 남으려면 감정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랜 친구가 말했다.
“넌 참 안정돼 보여. 항상 평온하지?”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그 말은 내 노력을 알아주는 칭찬 같았지만, 그토록 애써 꾸린 평온이 사실은 끙끙대는 억눌림의 결과였다는 걸 그때야 실감했다.
평온해 보인다는 건 그만큼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평온한 게 아니라, 무표정한 쪽에 가까웠다. 감정이 드러나면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나는 나의 일상을 늘 관리했다. 하지만 그 관리의 결과는 안정이 아니라 공허였다.
비밀은 점점 무게를 늘려갔다. 말하지 못한 감정, 하지 못한 말, 모른 척한 상처, 외면한 갈등. 그 모든 게 내 일상의 그림자가 되었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아무 일도 없는데 마음이 멀어졌다. 그건 감춰진 감정들이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조용히 일으키는 내면의 소음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소음을 없애려 했다. 명상을 하고, 글을 쓰고, 마음을 정리했지만 그 소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 속에 내가 감춰둔 ‘진짜 나’가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지만, 그 아무 일 없는 얼굴 아래에는 늘 많은 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씩 달라졌다. 비밀을 전부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숨기지 않으려 한다. 무심한 일상 속에서도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색으로 물들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때로는 그 감정이 너무 작고 사소해서 말할 가치조차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작은 감정들이 쌓여 나의 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조용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더 이상 감춤이 아니다. 이제는 그 속에서 나를 듣는 법을 배우고 있다. 침묵은 여전히 내 언어의 일부지만, 그 안에 감정의 온도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온기가 내 일상을 조금씩 덥힌다.
나는 여전히 단정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그 단정함은 비밀이 아니다. 감춰진 것들과 화해하며 사는 법, 그것이 내가 배운 새로운 평범함이다.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는 하루 속에서도 내 안에서는 매일, 조용한 진실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