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종종 듣는다.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다는 말은 언제나 기준을 전제로 한다.
대부분 그 기준은 ‘다수의 감각’으로 정해진다.
하지만 다수가 느끼는 편안함이 모두에게 같은 안전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익숙한 질서가, 다른 사람에게는 숨 막히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오랫동안 ‘정상’의 언어에 얽매여 살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해야만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감정은 늘 평균보다 빠르거나 느렸고, 생각의 결은 대체로 비스듬했다.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없잖아”라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게 필요했다.
그게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균일한 리듬을 요구한다.
사회적 예의, 조직의 문화, 가정의 역할까지.
어디에서나 ‘적당함’이 미덕처럼 강조된다.
하지만 나는 그 ‘적당함’이 늘 어렵다.
감정이 일면 쉽게 가라앉지 않고, 한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면 밤새 이어진다.
감정의 깊이와 생각의 속도가 달라서, 늘 어딘가 어긋난 느낌으로 하루를 보낸다.
예전엔 그게 나의 결함이라고 믿었다.
감정이 과하면 ‘예민한 사람’, 반응이 느리면 ‘무기력한 사람’, 혼자 있고 싶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나를 ‘비정상’의 위치에 놓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벗어날수록 더 불편해졌다.
정상으로 보이려 애쓰는 동안 나는 나의 감각을 억누르고, 나의 결을 지웠다.
상담 공부를 하며 깨달은 게 있다.
‘정상’이라는 말은 통계의 언어이지, 존재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각자의 균형점을 찾아간다.
어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나고, 어떤 사람은 고독 속에서 회복한다.
어떤 이는 하루에 수십 번 감정이 변하고, 또 다른 이는 일 년에 한 번밖에 변하지 않는다.
그 차이가 비정상이 아니라 개성이다.
한 내담자가 말했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감정이 너무 큰 것 같아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 감정이 당신을 망치나요, 아니면 살게 하나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웃었다.
“살게 하는 것 같아요.”
그 대답 하나가 모든 걸 말해주었다.
그가 가진 감정의 크기는 병이 아니라 언어였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의 표현일 뿐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정상’은 사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완벽히 합리적이다.
누군가가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건, 과거에 신뢰가 무너졌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늘 불안을 느끼는 건, 한때 아무 경고 없이 삶이 무너진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 뒤에는 그 사람만의 생존 논리가 숨어 있다.
그 논리를 이해하면, 비정상은 더 이상 낙인이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수가 적고, 감정을 쉽게 숨겼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냉정하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건 냉정이 아니라 보호였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어가 있다.
그 방어는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지, 잘못이 아니다.
나는 그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나는 누군가의 다름을 볼 때 판단 대신 궁금증을 갖는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가 아니라
‘저 사람에겐 저게 어떤 의미일까?’라고 묻는다.
그 질문 하나가 관계의 거리를 바꾼다.
그제야 서로의 리듬이 어긋나도 괜찮아진다.
세상은 여전히 ‘정상’의 자리를 좇지만, 나는 이제 그 자리에 매달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비정상은, 누군가의 정상이다.
그 다양함 속에서 세상은 살아 움직인다.
우리는 다 다른 리듬으로 숨을 쉬고, 그 차이 덕분에 세상은 멜로디를 갖는다.
나는 이제 나의 어긋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어긋남이 내 삶의 리듬이고, 나의 감정이 세상을 느끼는 고유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정상이라는 이름의 틀을 벗어나자, 비로소 나답게 숨 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