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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Dec 05. 2016

방송작가의 소개팅

최악의 소개팅

'김편리(가명) 라고 합니다. 방송작가예요.'


내 소개에 , 앞에 앉은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신기한 일을 하시네요'

내겐  익숙한 리액션이었다.

문제는  다음.

익숙질문들이 이어졌다.


'예능 진짜 짜고 하는거예요?'

'제가 미드를 좀 봐서 아는데... 한국 드라마는...'

'연예인 ㅇㅇ은 진짜 성격이 어때요?'

'진짜 ㅇㅇ가 게이예요?'

‘그 작가는 또라이라면서요?’

.

.

이하 생략.


두시간 내내 방송 작가 업무의 시스템과

한국 방송의 단점 고찰 및 평론이 이어졌다.

나도 처음 듣는 온갖 루머와 찌라시가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소개팅이 아니라 방송 세미나에 온듯 했다.


내가 여기에 왜 나온거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말 황금 시간대에 머리 말고 예쁜 옷 입고

불편한 구두 신고 얼굴도 보기 싫은 상사와 잔업하는 기분의 소개팅이라니!

대충 '글쎄요..글쎄요'로 일관하며 대답에 응하던 나는 결국,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ㅇㅇ씨. 저는 어디 가서 제가 방송작가라고 말 잘 안 해요.”

"그건 왜....?"

"저에 대해서 묻지는 않고, 초면에 제 일에 대해서 너무 꼬치꼬치 캐물어서요. 그게 실례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보더라구요."

"아....신기해서 그렇죠. 신기해서. 이해좀 해주세요.하하!”


나의 공격적인 대꾸에도 상대방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화살이라곤 깨닫지 못한 듯했다.


"지금 물어보신 질문들의 다음 순서 제가 맞춰볼까요? 설마 어떤 연예인이랑 친해요? 어떤 연예인이 제일 착해요? 이런거 물어보실 건 아니셨겠죠?”

웃으며 넘겨보려던 내 뼈있는 말에 그는 기다렸단 듯 받아쳤다.


"우와, 어떻게 아셨어요! 다음에 바로 물어보려 그랬거든요! 혹시 한지민 보신적 있어요? 한지민이랑 친해요?”


그의 얼굴은 화색이 돌다 못해 붉게 상기됐다.

내가 한지민의 “한” 자만 입에 올려도 기뻐서 이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날 듯 기대에 가득 차 보였다.


"이제 그런 질문 하실 때가 된거 같았고, 묻지 않으셨으면 해서 미리 말씀드린 건데... 기어코 물어보시네요. 친해지면 언제고 자연스럽게 나올 기회가 있을텐데 초면에 남 얘기 하고 싶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부업이 연예부 기자라도 되나 궁금할 정도로 집요했다.


"그런가요? 어차피 저에게 얘기 해주셔도, 제입장에선 연예계 루머처럼 걸러서 받아들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순간 그 남자에게 내 기분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한지민 배우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야겠다는 열망만이 가득차 보였다.

다시 이 사람을 볼 일도 없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해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얘기를 시작했다.


"저는 방송계 종사자예요. 방송작가 꼬리표 달고 초면에 연예인 뒷담화 하는거면 제이름 걸고 책임져야 하니, 그순간부턴 루머가 아니라 진실이 돼요. 이쯤 되면 안물으실 법도 한데 왜 이 얘길 ㅇㅇ씨께 구구절절 설명해야하는지..."

"아..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가 실례했네요."


이렇게까지 얘기해야 알아듣는 분과 지금껏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니, 현타가 진하게 몰려왔고

우리 테이블엔 정적이 흘렀다.

연예계, 방송계 얘기를 생략하니 대화 또한 급속히 줄어들었다 .

내가 얼마나 매력이 없었고 첫인상부터 별로였으면 이 사람이 저런 질문만 해댔나 싶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인연이 아니었겠지, 그러려니 하곤 집에 가려는데 그가 말했다.


“편리씨, 저는 편리씨하고 오늘 시간이 너무 즐거웠는데. 혹시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오 마이 갓.

나는 한시간 반 동안 그사람의 1인방송과도 같은 TV비평을 들어 지친 상태였고

그사람에 대해 아는 것 뿐이라곤, 이름 나이 직업 외엔 거의 전무였다.

대답은 당연히 No였고 그와의 연락은 끊겼다.

최악의 소개팅이었다.


'하시는 일이 뭐예요?' 라고 묻는 질문은

‘당신을 좀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친교의 뜻임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초면에, 남(연예인) 욕을 해달라,

증권가 찌라시가 맞느냐 아니냐 하는 건

서로를 알아가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하러 나온건지 사람을 만나러 나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 뒤로, 소개팅을 하지 않겠다 마음 먹었지만

사람은 외로우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비슷한 경험은 이 뒤에도 계속됐고 여전히 난 고통받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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