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유럽은 유럽이다. 불 꺼진 건물이 이렇게 예쁘다니. 아 신난다. 어떻게 나 너무 신나.
그렇다. 나는 바퀴 빠진 내 캐리어를 그새 잊었다. 그저 아름다움뿐이다.
우리는 늦은 밤 도착이라 당일에 잠만 자고 다음날 숙소를 옮길 생각으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잡았다. 숙소 앞에 도착해서 호스트의 안내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근데 이거 너무 좁은데? 우리 방은 4층. 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와 R의 캐리어를 운반했다. 아니 영화에서나 보던 엘리베이터잖아? 문이 없네? 너무 덜컹거리는데.. 웃긴데 무섭다. 무서운데 웃기다ㅎㅎㅎ
그렇게 숙소에 도착해서 잠깐의 쉼을 가지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벌써 시간은 자정이 넘어가는데 얼른 씻고 자야지.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을 이용했는데, 놀라운 그곳의 상태. 바르샤바 공항에서 한 번,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번. 약간 앞으로의 시간이 조금 걱정되는 밤이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오니 이제야 보이는 나의 캐리어. 자세히 보니 바퀴가 통째로 빠져버렸다. 그 바퀴를 주워온 내가 너무 웃기다. 우선 캐리어 사진을 찍어놓는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내일 시간이 나면 항공사에 메일을 보내야겠다. 그나저나 별일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게 누워있는 저 캐리어를 끌고 내일 도보 15분 거리에 있는 숙소로 이동해야 한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나 쓸 줄 알았던 보스턴백을 첫날부터 펼친다. 짐을 나눠 담아 이고 지고 가야 된다니. 벌써 조금 피곤하다.
아 그리고 새로운 캐리어도 사야지. 예측불허의 유럽 여행이 참 어이없으면서도 웃기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계획에도 없던 캐리어 쇼핑을 유럽에서 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새로운 캐리어를 살 운명이었던 걸까. 만약 여행 전 새로 산 캐리어가 이렇게 유럽에 오자마자 부서졌다면? 아찔하네.
씻고 나와 내일의 준비까지 마치고 삐거덕 소리가 나고 엉덩이가 푹 파인 철제 침대에 누우니 실감이 나다가도 믿기지가 않는다. 유럽에서의 첫날밤. 기분이 오묘하다. 지난 시간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올 한 해는 힘듦으로 시작한 한 해였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늘 새해에 힘든 일들이 많았던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저 잠깐 힘들다 말겠지, 금방 괜찮아지겠지. 하며 살아왔는데 올해는 그 힘듦이 참 길었다. 그런 시간을 거쳐 나는 지금 유럽에 와있다. 새해에만 해도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누워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두 달 전인 지난 8월 말 SNS에 ‘프라하로 떠나는 상상’이라는 게시물을 올리면서 한 막연한 상상이었는데 이렇게 정말 프라하로 떠나오게 되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처럼 당장 내일의 일도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안에서 예측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 살고 있는 이 삶이 참 신기하면서도 버거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날도, 오늘이 끝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좋은 날도 늘 그렇게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삶의 파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응원한다.
물론 나 자신도.
덧붙이는 말.
지금 생각해 보면 다음 숙소로 이동할 때 택시를 타도 되었는데 그때는 무슨 마음이었지. 돌바닥으로 유명한 프라하 돌길을 기어코 바퀴 세 개로 잘도 걸었다. (대충 바퀴가 세 개만 있어도 괜찮다는 이야기. 두 개가 빠진 게 아닌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
여행이 주는 초인적인 힘. 그리고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