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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03. 2020

2일: 폭우가 공평한건 아니야

우리의 편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진다

(8월의 기록은 인스타 라이브방송과 연계되어 남겨집니다. 방송에서처럼 편한 대화체로 써내려가려구요.)


 오늘 서울은 호우 경보까지 내려졌죠. 하천과 맞닿아 있는 저희 집 거실에서는 종일 안내방송이 들렸어요. 하천이 범람할 위험이 있으니 산책을 자제해달라는. 시시각각 폭우에 의한 피해 소식이 뜰때면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마을이 침수되고 산사태로 고립되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구조하는 이들의 안녕을 간절히 바래보지만, 하늘은 너무나 무심합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비가 멎은 듯 보이는 오전에 잠시 외출을 했어요. 점심시간이 지나 귀가하는 길에 엄청난 폭우를 맞았죠. 가로수 아래 멈춰 서서 조금이라도 비를 피해보려고 했습니다. 제 손에는 저녁 재료를 산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는데, 비에 흠뻑 젖어 겉에 붙은 영수증마저 너덜너덜해졌더라구요. 그때 문득 지난 일이 떠올랐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에 완전히 젖은 상태로 도착한 택배상자요.




 며칠 전 제주 업체에서 과즐을 주문했어요. 달큰바삭한 과즐은 제가 참 좋아하는 과자 중 하나예요. 선물로 드리고 싶은 분이 많아 꽤 많은 양을 샀는데, 종이박스가 거의 찢어질 듯 망가져 있었습니다. 과즐 포장 겉면에도 물이 묻어있고, 낱개포장된 비닐 안에도 습기가 찬게 확연히 보였죠. 전 교환을 요청했습니다. 업체에서는 바로 제 요청을 받아주어 새 상품을 보내주었고요. 그런데 어제 JTBC 저녁 뉴스에서 배달원과 택배기사의 고충을 보게 되었습니다.



  

*JTBC 저녁뉴스 <한민용의 오픈마이크>. ‘사망자 나온 ‘폭우’에도 “배달이요”’ (2020.8.1일자)

십분가량의 영상이니 봐주세요. 배달원과 배송 기사의 생생한 말은 평소 우리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이니까요.


 이 코너에서는 침수가 되거나 비로 미끄러운 도로 위를 1분 1초를 다투며 달려야하는 배달원이 나오고, 배송하는 택배상자들이 젖지 않게 지키느라 정작 자신은 비에 젖는 배송 기사가 나옵니다. 예상 배달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거나 택배상자가 젖어 훼손되면 그 피해액을 고스란히 물어야하는 장본인도 그들입니다. 배달과 배송 한 건에 책정된 낮은 수익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가능한 한 많이,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은 시야를 가리는 빗줄기 속을 내달립니다.




 손에 쥔 폭삭 젖은 비닐봉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어요. 하물며 나의 짐조차 어쩔 수 없이 젖고마는 이 폭우에 택배상자가 훼손되지 않게 배달하는 건 가능할까? 최단시간으로 계산된 배달 시간 안에 안전히 물건을 전달하는 게 맞는 걸까? 한 배달기사는 비가 많이 오니 천천히 안전하게 오라는 고객의 말 한 마디에 울컥한다고 인터뷰합니다. 우리는 익숙해진 일상의 편의가 누군가의 노동, 심지어는 희생의 대가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듯 해요. 몇 달 전 쿠팡과 마켓컬리의 물류 창고에서 코로나 집단 감염이 발생했을 때를 되짚어볼까요? 그때 많은 이들은 배송 기사들이 감염 예방수칙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비난했죠. 그러나 그러한 위반이 그들이 놓여있는 열약한 산업구조와 불합리한 노동계약과 연결되어 있는 사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택배 상자를 받지도 않은 채 돌려보내거나 택배 트럭이 단지 내에 진입하는 것을 반대하기까지 했죠.    

 



 저는 폭우에 대비해 상품을 제대로 포장하지 않은 판매자에게 항의하며 교환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판매자가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애꿎은 배송기사가 교환 비용을 지불하게 된 건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어요. 자연스럽게 지난 연말 보았던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 영화가 생각나더라구요. 집안의 가장인 리치는 배송 기사로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배송기업에 고용되는 형태가 아니라 개인이 사업자로 등록하여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운송차와 GPS 추적기 등을 사는 초기 비용도 개인이 부담해야하기 때문에 주택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배송 상의 실수나 상품 훼손에 따른 보상도 고스란히 개인사업자가 감당해야 했고, 기업이 리키에게 주는 것은 매일의 노동 할당량과 물어야하는 손해액 청구서 뿐이었죠. 리키가 기댈 수 있는 안전망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다양한 긱 이코노미 노동자 중 택배 기사를 소재로 삼은 것은 이들의 노동 착취가 현대 기술을 이용하면서 대두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화장실 갈 시간도 용납하지 않는 ‘배송 위치 추적 기술’과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어 배송에 문제가 생길 시 기사가 책임을 져야하는 구조로 기사들은 과도한 시간 동안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면서도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에 더해 폴 래버티 작가는 불합리한 노동구조가 노동자 개개인에 대한 착취 뿐만 아니라 가족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인간관계에까지 투영되는 것을 다루었다. 리키와 애비가 반복되는 12-14시간 노동으로 지쳐가는 동안 자녀 ‘세브’와 ‘라이자’는 무방비하게 방치된다. 이 과정에서 10대 아들 세브는 미래의 희망을 부정하는 청년 세대가 된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작품 설명 중



불합리한 노동 구조가 개인과 가정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엔딩에선 울음을 참는 게 불가능했어요. 모두가 보고 우리 사회를 생각해봤으면 하는 <미안해요 리키>



 코로나로 현장 구매보다 온라인 쇼핑의 비중이 높아졌고 이 비대칭적인 구매패턴은 장기화되고 있어요.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씨에는 평소보다 배달음식 주문량이 곱절로 뛴다고들 하고요. 비용을 지불하고 편리한 소비를 하는 것은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 과정에 연루된 타인들을 배려하는 마음은 인간된 도리입니다. 갓 만든 음식을, 헐겁게 포장된 택배를 배송하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안전과 생계가 지켜질 수 있도록 우리부터 노력하는 게 필요해요. 그들의 취약한 노동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그들 개개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일 겁니다. 그 마음들이 모여 사회적인 목소리가 되면 변화는 시작될 거예요.


배달의 민족 앱에도 뜨는 안내문. 이런 인식이 공식적으로 표명되기까지도 변화가 필요했지만. 소비자의 ‘배려’를 요청하는 대신 기업의 ‘안전망’은 얼마나 구축되어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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