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행복에 대한 L과의 대화 (1)
페이스북에 내가 올린 글을 보고, L이 같이 대화해보고 싶다는 댓글을 달았다. L은 대학 친구다.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만날 때마다 늘 밝고 유쾌하게 인사하고 지내던 친구였다. 먼저 대화해 보고 싶다고 요청해준 것이 고맙고, 반가웠다. 아이들이 자는 주말 아침 7시에 카톡으로 만나기로 했다.
나: 안녕. 오랜만이야. 너무 반갑다.
L: 응. 안녕. 오랜만에 봤는데도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다. 엊그제까지 대화하던 느낌이야.
나: 어. 나도 하나도 안 어색해. 그런데 너랑 대화를 오래 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 ㅎㅎㅎㅎ
L: 맞아. 생각해보면 우리 대학 때도 대화를 거의 안 했어. 동아리도 같았는데 내가 동아리 활동을 거의 안 했었고. 그래도 친한 친구들이랑 가까워서 친숙하게 느꼈던 것 같아.
나: 너도 같은 동아리였구나. 맞다! 얘기하다 보니 대학 때 생각도 많이 난다.
#1. 끝없는 도전, 그리고 싱가포르에 정착하기까지
나: 네가 일본에서도 살았었고, 지금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잖아. 그렇게 해외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했었어. 어떻게 해외에서 살게 된 거야?
L: 대학 때 수학과를 졸업했잖아. 그리고 원래는 유학을 준비했었어. GRE 시험공부해서 점수까지 받았었거든. 그런데 막상 학교 지원하고 자기소개서 쓸 때가 되니까 공부가 전혀 하고 싶지가 않았어. 무슨 연구를 하고 싶다고 써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 어릴 때는 막연하게 ‘나중에 해외에 나가서 글로벌한 인재로 살아야지.’ 생각을 했었고, 그냥 다른 친구들처럼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사실 나는 공부는 전혀 하고 싶지가 않았어. 그래서 은행에 지원서를 냈고,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하는 부서에 취업을 했어.
나: 네가 은행에서 일을 시작했던 거구나.
L: 응. 그때 처음으로 일하던 은행에서 선배들이 싱가포르에 가는 걸 봤어. 그래서 또 막연하게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해외에 갈 기회가 생기겠구나 생각했지. 그러다가 2008년에 다른 외국계 은행으로 이직했어. 그런데 금융위기가 오는 바람에 내가 하려던 일이 회사 내에서 무산이 됐고, 한동안 하는 일없이 눈치 밥을 먹고 있었어. 그때 홍콩에서 새로 상사가 왔는데, 그분한테 일이 하나도 없고,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얘기했어.
나: 솔직하게 너의 상태를 얘기했구나.
L: 응, 솔직하게 얘기했지. 그랬더니 나한테 일을 주기 시작했고, 내가 또 그 일을 잘했던 것 같아. 1년 뒤 그분이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를 데려갔었어. 그래서 1년은 영국에서 지냈지.
나: 영국에서 지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어. 네가 그래도 신임을 받고 일을 잘해서 그런 기회까지 생겼나 보다.
L: 그런데 1년 뒤에 그 상사가 ‘영국에 계속 있을래, 아니면 어떻게 하고 싶어?’라고 물어봤어. 내가 영국에 친구나 가족도 없고, 많은 게 낯설어서 너무 힘들었었거든. 그래서 아시아로 가고 싶다고 얘기했어. 한국은 회사에서 사업을 작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가 없었고, 2순위로 일본을 생각했는데 일본에 마침 자리가 생겨서 가게 된 거야.
나: 그렇게 일본으로 가게 됐구나. 그런데 일본에서 살려면 일본말을 해야 한다고 들었거든. 너는 일본말을 알고 있었어?
L: 아니 일본말 하나도 몰랐어. 그런데 그때 일본 금융계에는 외국인이 많았어. 상사도 영국인이어서 일본어를 전혀 안 해도 됐어. 그때 일본 간 게 내 인생에 처음으로 일본을 간 거였어. 그전에 일본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한국이랑 제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했던 거야.
나: 굉장히 큰 도전이었다. 용감했다는 생각도 들고.
L: 그런데 난 일본에 오니까 너무 좋았어. 영국에서 일할 때는 주변에 백인 남자들이 주였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위축이 많이 됐던 것 같아. 그런데 일본은 주변이 다 아시아 사람들이니까 너무 편하고 친숙한 거야. 일본어를 못해도 그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어.
나: 언어적 장벽도 뛰어넘은 거구나. 그 당시 상황에서 네가 유연하게 너의 길을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L: 응, 그리고 그때 남자 친구가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로 오고 싶은 마음도 컸어. 그래서 결혼하고 한동안은 남편은 한국에서, 나는 일본에서 살면서 떨어져 지냈었지. 적당한 자리가 생기면 내가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버린 거야.
나: 갑자기 사표를 내셨다고? 계획도 없이 그렇게 됐던 거야?
L: 응. 다른 대책이 없었어. 그래서 남편도 일본에 온 거지. 남편이 일본어를 못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일본어 공부도 하고, 1년짜리 MBA도 다니고, 알바도 하고, 중소기업에 몇 개월 취업도 하고 나름 남편도 일본에서 적응해 살려고 노력을 했어. 그 사이에 나는 계속 다니던 직장에 다니면서 같이 첫째 키우고 있었고. 둘째도 갖고 남편도 일본에 대기업에 취직해서 다니다가... 그러다가 남편이 싱가포르에 취업을 하게 되었고, 나도 같이 싱가포르로 오게 된 거야. 그게 2018년도였어.
나: 와. 너의 삶이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힘들게 느껴질 수 있는 상황들에서도 네가 중심을 잘 잡고 그 시간들을 지나왔구나. 삶에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는데, 그 순간순간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선택을 했고, 그 선택들이 지금의 싱가포르라는 곳까지 너를 이끌어준 거구나.
#2.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지’
나: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어?
L: 지금까지 계속 리스크 매니저 일을 했었어. 리스크 매니저가 하는 일은 회사의 자산이 어디에 투자되어 있고, 리스크 테이킹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지 분석해서 모니터하고 과도한 리스크를 지지 않도록 하는 거였어. 그 일을 15년 정도 했어. 그리고 작년에 회사 내에서 이동을 해서 Change Manager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쉽게 보면 프로젝트 매니저 같은 역할이야. 회사에 새로 시스템이나 프로세스를 바꾸려고 할 때 그것을 주도해서 변화하는 과정을 이끄는 거야.
나: 그럼 지금까지 계속 해오던 일에서 다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구나?
L: 응. 처음에 이 일을 시작할 때, 나랑 일이 잘 맞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 영어가 네이티브가 아닌데, 새로 맡은 일은 회의도 열고, 사람들 간 조율해야 할 것도 많고,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일이 많았거든. 나는 원래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있었어.
나: 전에 하던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주였다면, 새로 맡은 일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하는 일이 주가 되었구나.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이면 언어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어?
L: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어, 지금도 조금 그렇고. 사람들이 자신의 약점에 좀 더 민감하게 생각하고 약점 때문에 내가 잘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잖아. 그래서 나도 내가 영어를 좀 더 잘했더라면,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 그런데 이런 생각이 옛날에 비해 많이 없어졌어. 일을 하다 보니까 영어보다도 그 상황을 잘 알고, 그 상황을 어떻게 바꿔나가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했어. 언어보다도 의도 혹은 의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
나: 언어보다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공감된다. 외국에 나가보면 말은 잘 못해도 진심으로 대화하려고 노력하면 외국인들과도 통하게 되는 게 있잖아.
L: 어.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한테 상담을 한 적이 있었어. 내가 영어로 말하면 내 귀에는 내 한국어 악센트가 어그레시브 하게 들렸거든. 그래서 회의에서 사람들한테 반박할 때 사람들이 내 악센트 때문에 나를 더욱 공격적으로 보거나 안 좋게 볼까 봐 회의에서 긴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랬더니 그 상담해준 사람이 ‘물론 내가 남들과 다른 악센트가 있는데, 내가 일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내 악센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거 같다는 나의 인식이지 악센트 자체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더라고.
그 후에 내가 생각해보니까, 나도 좀 싫어하는 악센트가 있고, 어떤 외국 사람과 마주했을 때 그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악센트가 강하면 처음에는 그 사람에 대해 거부감이 있지만, 계속 그 사람과 알게 되고, 계속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게 원래 그 사람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잖아. 결국 내가 악센트 때문에 그 사람을 나쁘게 보지는 않더라고. 그래서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언어가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일에 지장이 있거나 잘 못한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된 것 같아.
#3. 평가받는 사회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
나: 회사에서 또 어려운 점은 없었어?
L: 어려운 점 많았지. 나는 최근 2-3년이 많이 어려웠어. 내가 일을 오래 했잖아, 2006년도부터 거의 쉬지 않고 일을 했으니까. 어렸을 때는 일이 쉬웠어. 시키는 것만 하면 됐고, 간단하게 느껴졌어. 그런데 내가 연차가 쌓여 시니어가 되니까 고민하는 게 훨씬 많아졌어. 회사에서 나를 어떻게 포지셔닝할지도 생각해야 하고, 또 내가 어떤 성격이고, 내가 왜 이런 행동에 스트레스를 받고, 사람들 눈치를 보고 이런 것들도 고민이 되는 거야. 이건 지금도 고민하는 과정에 있어.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해야 하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 일일이 신경 쓰고 눈치 보고 하다 보니 내가 너무 스트레스받고 힘들더라고. ‘내가 말을 잘못했는데 이 사람이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영어를 잘 못하니까 상대방이 얘 영어도 잘 못하네 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괜히 얘기해서 쟤한테 참견한다고 생각하려나?’ 등등 이런 온갖 걱정들을 하면서 살았던 거야.
이제는 많이 내려놓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스트레스 안 받고 살려고. 내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된 거지. ‘누군가 나를 미워해도 내가 그거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지.’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을 매일매일 마인드 컨트롤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 업무성격 때문만은 아니고, 위로 올라갈수록, 만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건 계속 안고 가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
나: 이런 생각은 직장에서만 그래? 아니면 살면서 가족이나 직장 외의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도 사람들을 많이 신경 쓰고 그래?
L: 직장 외의 사람들을 만날 때는 신경 안 쓰지. 나는 원래 불특정 다수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야. 그런데 회사에서 내 직급이 달라지다 보니까 나를 평가하는 회사의 방법이 달라지더라고. 옛날에는 상사만 나를 체크하면 됐는데, 이제는 온갖 사람들한테 체크를 받아야 하는 거야.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내서 일이 되게끔 해야 하니까,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인식이 내 평가에 중요하고, 그러다 보니 그 사람들이 다 나의 상사랑 다름이 없는 거야.
나: 맞아. 그럴 것 같아. 모든 사람에게 다 잘해야 좋은 평가를 받는 시스템 안에 있는 거잖아.
L: 그렇지. 예전에는 한 명이었다면 이제 열명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 솔직히 나에게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경을 안 써. 그런데 그렇게 열명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사사로운 반응까지 신경을 쓰게 되는 거지. 그래도 계속 덜 신경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
#4.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것
나: 그럼, L은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L: 어.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게 없어.
직업을 선택하는데 세 가지가 있는 거 같은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내가 좋아하는 일이냐, 내가 잘하는 일이냐가 있는 거 같아. 첫 번째에 대해서는 내가 한 때 잠시 '은행이 사회에 도움이 안 되니까 다른 업종으로 빠져야겠어.’라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어. 은행이 실제적인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돈을 이동시키는 다양한 도구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괜히 빈부격차만 부채질한다 등의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어.
그런데 이것도 사실 생각하기 나름이잖아. 사회로 보면 굉장히 많은 직업이 있고, 많은 일들이 있잖아. 그 일들에서 내가 사회에 이바지가 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적 해석의 문제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이제는 은행이 망하면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나름 은행을 안 망하게끔 이바지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
그다음에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일인가 잘할 수 있는 일인가를 고민해봤지.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일은 정말 못 찾겠어.
나: 생각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아. 나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계속 살아오기도 했고. 특히 우리는 다양한 시도를 하기보다는 공부하고, 일하고 하면서 사회에 정해진 길을 걸어왔잖아. 혹시 취미로 하는 일은 없어?
L: 취미야 운동도 하고 그렇긴 하지. ‘직업으로 꼭 하고 싶다’, ‘내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하는 액티비티나 분야가 없어. 그리고 어느 정도 로지컬 하게 생각하는 것, 사람들과 문제들을 풀어가는 게 나름의 재미가 있어. 이걸 통해서 내가 배워나가는 게 있고, 내가 중간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있어.
내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 그래서 지금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내가 이 일을 똑같이 해도 덜 스트레스받고, 더 가볍게 행동하고, 더 나답게 행동하고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고 등의 ‘어떻게’ 부분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어.
나: 와. 너무 좋은 말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생각하는 거 너무 공감해. 나도 최근에 비슷한 경험을 했어. 사실 현실에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시선을 달리하니까, 내가 불평불만을 갖고 있는 것들이 큰 문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 감사하게 느껴졌어.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아.
L은 벌써 15년이 넘게 자신의 커리어를 꾸준히 지켜왔다. 그 속에서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삶에 대해 고민해 오기도 했다.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하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L도 그랬고, 나도 그랬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지가 더 중요함을 깨닫고, 하루하루 더 가볍게, 자신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친구의 모습이 참 멋있었다.
CoverImage by Headway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