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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13. 2016

우리에게 ‘주도적인 삶’이 가능한가?

[서평]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 본문 26쪽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을 적확히 지적한 말이다. 우리는 성과를 종용하는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려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착취함으로써 자신을 수단화하고 있다. 19세기의 노예와 다를 바 없이 노동과 생산의 객체로 전락한 우리는 자아를 상실한 로봇과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독일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2012)를 통해 성과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과도한 긍정성과 이로 인한 자기 착취로 인해 느끼는 피로와 무력감, 우울증 등의 신경증적인 질병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평전 <우리는 사랑하는가>(박홍규 지음)에 따르면, 에리히 프롬은 이보다 훨씬 앞선 1937년에 ≪사회연구지≫에 발표한 논문 <무력의 감정>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경제적 변화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한편, 체념과 무기력, 맹종이라는 인간 소외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국내에 최근 번역 출판된 이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진짜 삶’ 즉, ‘(자아의) 주도적인 삶’이라는 주제로 에리히 프롬의 조교인 라이너 풍크가 엮은 것으로, 논문 <무력의 감정> (책의 ‘일러두기’에는 <무력감에 대하여>로 번역되어 있음)과 강연 발표 자료,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한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무기력한 이유      


저자 에리히 프롬은 책에서 우리가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무기력한 이유를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라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보이는 삶’에 주목한다. 개인이 지닌 성품이나 가치관이 아닌, 외모와 스펙, 경제적인 생산능력과 부(富)가 개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로 자리매김한지 이미 오래이다. 이러한 사회의 표준화된 기준(?)에 부합하려면 자신의 진정한 생각과 느낌 따위는 접어 두어야 한다. 개인의 자발적인 행동은 지양되고, 사회의 요구에 따르는 수동적 행위가 지향될 뿐이다. 가짜 자아, 즉 사회적인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이 무력감과 열등감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병이라고 일컬어지는 우울증이 사회에 만연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진짜 삶’, 즉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타인에게 자신의 진정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지는 과연 우리의 것일까?      


하지만 이토록 간명한 진실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무엇이 우리 자신의 진짜 생각이고 감정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일 거다. 저자는 우리가 가진 생각이 사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주입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최면 실험을 사례로 든다.     


최면을 통해 암시된 내용은 간단하다. 피실험자 A가 자신이 쓴 원고를 가져왔는데, 찾아보니 자리에 없다. A는 누가 훔쳐간 것으로 믿고, C에게 화를 낼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A가 원고를 가져오지도 않았고, A는 C에게 이전에 어떤 반감도 갖지 않았다. 실험 결과는 어땠을까? 최면에 걸린 A는 최면을 통해 암시된 내용을 진짜로 여기고 C에게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심지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합리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실험결과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생각과 느낌, 소망은 물론 심지어 감각적 느낌까지도 주관적으로 우리 것이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 본문 119쪽     


우리의 생각과 감정, 심지어 의지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인 생각이 있던가?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종합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내면화하기도 하고, 미디어와 언론을 통해 주입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사고와 태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외부의 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느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느냐다. 전자의 경우는 우리가 사유한 결과이므로 우리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주입된 정보를 그대로 우리의 생각이라 ‘착각’한 경우다.      


감정과 의지 역시 다르지 않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진짜 감정을 억압하고 거짓된 감정을 내보인다거나 자신의 소망과 의지를 접어두고 타인(예를 들면 부모)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소망과 의지를 실천하려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진짜 삶’이 아닌 가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렇듯 원래의 사고, 감정, 의지의 행위가 가짜 행위로 대체되면 결국 가짜 자아가 원래의 자아를 대체하게 된다. 원래의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의 진짜 장본인이다. 가짜 자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자아의 이름으로 연기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 - 본문 139-140쪽      


결국 자신의 진정한 생각과 감정, 의지를 지니지 못한 현대인은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발적으로 행동하기도 어렵다. ‘가짜 자아가 원래의 자아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인간이 여론 등 ‘익명의 권위’에 순응하면서도 이를 자각하지 못함으로써 겪는 무기력을 통해, ‘마케팅을 지향’하는 인간이 스스로를 시장에 팔아야 할 ‘상품’으로 인식함으로써 겪는 소외와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진정한) 자아를 상실한 것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되는 무기력과 열등감의 악순환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무력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합리화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에 앞서 현대인이 겪고 있는 ‘깊은 무력감’을 좀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신경증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신경증의 중요한 특징이 “한 사람이 특정한 기능을 하지 못하며, 마땅히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이런 무능력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약하고 무력하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경증 환자가 겪는 무력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공기와 같다. - 본문 149쪽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평범한 일상에도 대처할 수가 없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려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하지 못한다. 타인의 모욕과 비난 등 외부의 공격에 맞서 자신을 제대로 방어하기는커녕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두려움에도 맞서지’ 못한다. 이들은 그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자기 확신에 집착할 뿐이다. 이러한 무력감의 자각이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이들이 고통의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무력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합리화를 시도한다고 본다. 자신이 무기력한 이유를 자기 신체의 결함에서 찾거나 과거의 특정한 경험을 떠올리고 여기에서 비롯된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어 무기력해졌다는 식이다. 그래야 심리적 무력감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좀더 심각하게는 자신이 대처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상상하거나 현실화함으로써 자신의 무력감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외부의 어떤 사건이나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무력감이 일시에 해소될 거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갖거나 (지나가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을 갖기도 한다.      


‘무력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 모든 합리화의 시도는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에 몸이 약하다(혹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거나 우리가 현재 불행한 이유를 자꾸 과거의 경험에서 찾으려는 노력들이 그러하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며 복권을 사거나 지금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서 10년 후의 성공을 꿈꾸는 등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소망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심리적 무력감을 합리화하느라 급급한 나머지 무력감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았기에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볼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감추고 싶어 했던 무력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일깨운 셈이다.      


‘진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마지막 진실은 무력감을 합리화하는 기존의 시도를 멈추고 무력감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진짜와 허울’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를 ‘추상(피상)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투영’하거나 ‘상대의 이미지를 왜곡’하지 않아야 그 사람을 사실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쉬운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흔히 그 사람의 나이, 성별, 외모, 옷차림, 직업, 경제적 능력 등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피상적으로 파악한다. 투영이나 왜곡은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예컨대 자신이 상대를 싫어하면서 상대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여기거나(투영) 상대방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 나머지 자신이 가져야 마땅한 것을 상대에게 빼앗겼다고 여기는 것(왜곡)이다.      


저자는 이러한 개인의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구분할 수 있어야 ‘온전한 현실’을 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현실에 꼭 들어맞는 응답을 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때 현실에 꼭 맞는 응답이란 어떤 것일까?   

   

현실적인 의미에서 반응하고 응답한다는 말은 나를 아프게 하고, 기쁘게 하고,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내 모든 인간적 힘을 총동원하여 응답한다는 의미다. 그럴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게 반응한다. 타인에 대한 나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나의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다. - 본문 192쪽      


타인이 처한 행복과 불행한 상황에 피상적으로 반응하기는 쉽다. 상황에 적절한 감정을 떠올리고 행동에 옮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타인은 나와 상관없는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저자는 상대에게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응답한다는 것을 상대가 더 이상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상대와 내가 구분 없이 하나가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타인이 겪고 있는 상황과 그가 느끼는 감정에 공감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현실에 꼭 맞는 응답을 하기 위해, 즉 우리가 진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세상에 놀라고 감탄하는 능력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능력, 그리고 자아를 경험하는 능력과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제시한다. 이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자아를 경험하는 능력이다. 대체 자아를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아를 경험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 본문 196쪽      


저자가 말하는 바대로 진정한 자아를 느끼고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팀 로빈스)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앤디는 감옥 속에서도 자기의 진짜 생각과 감정, 의지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잃지 않은 유일한 존재였다. 이와 달리 브룩스(제임스 휘트모어)는 오랜 시간 감옥 속에서 내면화한 수동적인 삶으로 인해 자기 내면의 두려움에도 맞서지 못할 만큼 무력감에 빠진 안타까운 존재였다. 이 두 인물을 비교함으로써 진짜 자아를 잃고 무력감에 빠진 존재와 진정한 자아를 경험하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씩은 현실에 대한 ‘깊은 무력감’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브룩스와 같이 심리적 무력감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나중엔 회복되기 어려울 만큼 우리의 내면이 취약해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앤디와 같이 진정한 자아를 경험하며 주도적인 삶을 살고 싶다면, 자신의 심리적인 무력감을 직시하기 위해 용기를 내 보는 게 어떨까?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그러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손을 내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 책 정보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장혜경 옮김/ 도서출판 나무생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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