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글을 읽는 사이 공감하고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울림을 잡아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언어의 틀 속에 정교하게 맞춰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똑같은 말도 각자마다 경험과 다른 생각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추상적인 언어들을 연결한 문장으로 마음을 전달한다는 건 애초에 불완전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 마음의 무늬를 그대로 베껴놓은 듯한 문장을 만나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문장들은 읽는 순간 희미했던 감정의 테두리를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마치 이름 없는 감정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주는 것처럼. 읽는 사이, 우리는 관계를 맺는다. 글을 쓴 사람과, 혹은 그 글을 함께 읽은 누군가와. 작가의 마음에서 다른 파동이 일어나지만, 그 울림은 때로 조용한 연결이 된다.
어느날 친구의 프로필 사진이 바뀐것을 보았다.짧은 문장만 있는 사진이었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그 친구가 요즘 어떤 생각에 머물러 있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수집해 두었던 문장 카드들 중 몇장을 골라 아무 말없이 보냈다.
잠시 뒤, 답장이 도착했다.
“무슨 일 있어?”
내가 건넨 문장은 말이 없었지만, 그 안엔 조용한 질문이 있었던 걸까 카드 한 장, 문장 몇 줄.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결이 닿은 것이다. 그 친구는 잠시 침묵하다가, 요즘 자꾸 감정이 오락가락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털어놓았다. 특별한 일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외로운 날들이라고. 우리는 카톡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난 또 한 장의 문장을 보냈다.
<마음이 어딘가에 닿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건 내가 언젠가 책에서 읽고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었던 문장이었다.
읽는 사이,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작은 틈을 발견하게 된다. 그 틈은 다정하고때로는 우리가 살아가기에 충분한 위안이 된다.
그리고 때로는 읽는 사이 나에게 주술적인 마술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불의를 보고 분노가 일어났을 때 화라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일은 나이를 먹는다고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 나는,누군가의 단단한 문장을 읽으며 마음의 경계를 조금씩 되돌려 놓는다. 읽는 일은 어느새 내 감정의 숨구멍이 되고, 나를 잃지 않게 돕는 작은 마술이 된다.
성을 내는 것은 쉽다.
참고 넘기는 것도 어렵지 않다.
낮은 목소리로
분노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단단한 문장은 나를 어루만지지 않지만, 대신 나의 울분을 가만히 받아내며 그 안에 담긴 목소리를 낮추게 한다.
사진: 브리튼 리비에르의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