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
서윤은 S백화점 한 브랜드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20대 초반, 서툰 몸짓, 손님 응대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늘 긴장했다. 와이셔츠 깃을 줄자로 재며 “다른 브랜드랑 왜 이렇게 사이즈가 다르냐”며 화를 내는 남자 손님 앞에서 그녀는 “죄송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선배 언니가 나서서 손님을 응대했다. 다른 제품으로 바꿔드리며 그 고객을 돌려보냈고, 서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화장실로 향했다. 긴장이 빠져나가던 그 짧은 틈이, 모든 시작이었다. 잠시 뒤, 매장으로 돌아온 서윤에게 선배가 흰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나도 몰라, 어떤 손님이 너한테 전해 달랬어”
서윤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곱게 접힌 편지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백화점을 오가며 서윤을 지켜봤다는 내용과,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말,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와 마지막 줄에는 매장이 문 닫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몸이 얼어붙었다. 어디선가 낯선 그림자가 따라붙은 듯한 불편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같이 가줄까? 궁금하잖아”
선배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서윤이도 사실, 궁금하긴 했다. 매장을 나와 그를 처음 마주한 순간, 그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소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용하고 초라한 옷차림. 그는 마치 벽에 기대어 서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작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매장을 찾아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거절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선배는 그를 가리켜 “성실하고 착실해 보여. 한 번 만나봐”라며 등을 떠밀었다. 서윤에게는 그와의 만남이 생애 첫 데이트였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 관계’라는 문을 처음으로 열어본 날들이었다.
그는 서툰 일상 속에서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매일
인사를 건네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의 존재는 그렇게, 점점 일상의 풍경으로 스며들었다.
그 무렵 서윤에게 도시는 너무 컸고, 낯설었다. 건물들은 다 닫친 창처럼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말을 걸면 이상하게 여겨질까 두려웠고, 무심한 거리의 침묵은 마음을 더 깊은 어둠으로 밀어 넣었다. 혼자가 아니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 그것이 도시에서 그녀가 처음 배운 감정이었다. 낯선 도시의 생활이 그를 통해 조금은 다정해졌고, 서윤은 그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와의 만남은 익숙해졌다. 그날은 그가 차를 가지고 시외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하자고 했던 날이었다.
차 안은 숨소리로만 가득했다. 시외 외곽의 한적한 길목 가로등조차 닿지 않는 밤, 차체는 어둠 속에서 바닥을 누르듯 멈춰 있었다. 서윤은 몸을 세우지 못했다.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언어의 형체를 갖추기 전에 숨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는 거칠고 젖어있었다. 무언가를 꺾은 뒤의 숨결, 가지가 부러진 뒤의 고요 속에서 던지는 말이었다.
“목이 타잖아”
그는 병째로 물을 들이켰다. 갈증을 씻는 게 아니라 갈증을 씹어 삼키는 듯한 숨소리
“힘으론 안 되잖아. 왜 그리 버텨 결국 서로 피곤해지게”
짐승이 자신이 먹은 것을 확인하듯, 다 먹은 것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만큼 눌러놓고 그 위에 흘리는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은 문이었다. 밖에서 잠긴 문, 도망치지 못하는 문, 자신의 존재가 흘러나가는 문, 서윤은 자신이 목소리를 잃고 있다는 걸 그 순간 처음으로 명확히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먼저 몸을 잃은 것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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