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끝난 뒤, 그가 물병을 들어 물을 마셨다. 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는 폭풍을 만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처럼, 거칠고 낯설었다. 마치 사나운 짐승의 이빨에 부딪히는 파편처럼 귀를 때리고, 그녀의 몸안에서 무언가를 부셔댔다. 벌컥벌컥, 입술과 턱을 적시며 마치 방금 전까지의 시간을 헹구듯 마셨다. 물을 넘기는 소리는 짐승의 포호처럼 들렸다. 그가 마신 건 물이 아니었다. 그건 욕망이었고 사람을 물건처럼 쥐려는 본능이었다 일어난 침범을 정당화하는 행위였고 끝난 후의 씻어내기처럼 느껴졌다.
그가 숨을 고를 때마다, 서윤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가슴 아래로 떨어진 감각은 무겁고 공허했다. 눈은 떴지만 보이지 않았고 귀는 열려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야는 흐릿했고, 차창엔 습기가 가득 차 바깥은 온통 뿌옇게 번져 있었다. 그녀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그저 자신안으로 파묻혀 있었다. 몸 안에 갇힌 채,시들어가는 식물처럼 누워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다. 햇빛은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고, 세수도 하기 전의 얼굴 위로 조용히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외출 준비하려다, 문득 멈췄다. 익숙하게 손이 닿던 가방이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눈을 돌려도 핸드백은 보이지 않았다. 지갑, 수첩, 립스틱, 작은 거울등 그녀의 평범한 하루가 들어있던 소지품들을 모두 잃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누군가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고, 위치 추적을 해 줄 앱도 없고, 어디서 흘렸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무언가를 놓친 게 아니라, 그걸 놓친 줄도 몰랐다는 사실이.
그날 밤이 떠올랐다. 차 안. 침묵과 어둠 사이. 그것을 내려두고 나왔던가. 기억은 희미했고, 손에 남은 감촉조차 없었다. 곧고 잘 자란 나무하나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것처럼,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툭, 빠져나간 자리엔 차가운 바람이 맴돌았다. 그의 차에서 도망치듯 내릴 때 떨어져 버린 것이다.
서윤은 다시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겁탈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 있었고 그가 있는 세상은 이제 그녀에게 너무나 낯설고 무서운 공간이었다. 결국 서윤은 조용히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며칠 뒤, 선배 언니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너 그만뒀는데도 계속 찾아와. 네가 어디 사는지 알려달라고도 해. 혹시… 무슨 일 있는 거니?” 서윤은 말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 언니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한 번만, 꼭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해. 말하는 게… 너무 간절하더라”
서윤은 흔들렸다. 그토록 끝내고 싶었던 관계였지만, 어쩌면 말로 정리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좋게 마무리하자는 생각으로 그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젠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사랑해서 그랬어. 다시 만나줘” 그 말들이 너무 간절해 보였고, 서윤은 그 순간, 그가 말한 ‘책임’과 ‘사랑’이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상처를 주는 사람도 한 번쯤은 자신을 지켜줄 수 있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무너졌던 감정을 붙들 수 있는 단 하나의 말, “사랑해서 그랬어”라는 문장을 그 순간만큼은 믿고 싶었다. 믿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자기 위안처럼. 진심이 아니라도 좋으니 누군가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말해주는 그 장면 하나에 끝내 마음을 기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히던 모습이 꼭 자신과 닮았다고 느끼곤 했다. 늘 큰딸에게만 유난히 엄격했던 아버지 앞에서는 말보다 감정이 먼저 무너졌고, 눈물부터 흘러나왔다. 지방에 계신 아버지에게 무엇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말로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만으로도 앞이 막막했다. 그 시절은 결혼 전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상식처럼 통하던 시대였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책임의 증명처럼 여겨졌다. 그러니 대학 졸업을 앞두고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조용히 밀려나 있었다.결국 그녀는,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창문 위로 사람들의 발목만 보이던 지하방에서 동거를 시작했다.좁고 눅눅한 방, 눌린 세간과 묵직한 침묵이 함께 눌러앉은 공간. 그곳엔 기쁨보다 먼저 책임이 있었고, 사랑보다 먼저 현실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삶이려니 하고 견디며 자신을 조용히 접어두었다.
하루하루가 스스로를 지우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체념이, 어쩌면 그 날 차안에서 그녀는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자신을 잃어가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비뀐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아름다움은 닿지 않았다. 눈을 떴음에도 모든 것이 프리즘 너머로 번져버린 풍경처럼 흐릿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존 에버릿 밀레이의 〈눈 먼 소녀〉처럼 가장 찬란해야 할 시절에, 세상을 앞에 두고도 느끼지 못한 채 감정의 커튼을 드리운 채 살아가는 사람.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내면의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