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좀 쉬자. 시골로 내려가자.”
그는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회사를 그만두었다. 서윤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결정은 언제나 '통보'였고, 그녀의 대답은 '순응'이었다. 그녀는 시부모의 밥상을 차렸고 어머님의 몸빼바지를 입고 밭일을 돕기도 했다.
“나는 밭에서 낳고, 그날 오후엔 김도 맸다“
시어머니는 호미를 손에 쥐고 끊임없이 일했고, 그 말엔 윽박이 아닌 묵은 기준과 기대가 배어 있었다. 서윤은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몸 상태인지, 얼마나 힘든지, 그저 어머님의 말 뒤에 고개를 한 번 더 숙였을 뿐이다. 배는 불러왔지만, 체중은 늘지 않았다. 식욕이 떨어져 거의 먹지 못했음에도 아이는 무사히 자라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비워지듯 버티고 있었고, 그 안의 아이는 기적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임신 8개월이 되어서야 서윤은 결혼식을 올렸다. 드레스 속에서 배는 선명했고, 축복보다 체면과 눈치가 앞섰던 날이었다. 사진 속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사회가 요구한 연기였고, 그날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라 제도였다.
지방 도시의 작은 집으로 분가했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남편은 여전히 한겨울에 자신이 먹고 싶은 귤을 사오라고 했고, 친구들을 불러 고스톱을 치며 임신한 서윤이 있는 방 안에서 담배를 피웠댔다.
진통은 어느 날 밤, 조용히 시작되었다. 그녀는 책에서 읽은 대로 첫 진통은 오래 걸린다 믿었다. 그래서 그를 출근시켰고, 그녀는 오전 내내 혼자 진통을 견뎠다. 점심 무렵, 서윤은 가방을 들고 조용히 병원으로 향했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나서야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제야 어머니는 아들에게 연락했다.서윤은 그에게 직접 알리지 않았다. 친정에도 알리지 않았다. 반대했던 결혼. 아버지의 화살이 늘 어머니를 향했기에, 서윤은 그 죄책감으로 엄마에게마저 알리지 못했다 병실 창문엔 겨울비가 얇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맑지도, 완전히 흐리지도 않은 하늘 아래, 물방울은 창틀을 타고 천천히 흘렀다. 겨울의 공기엔 빛보다 습기가 먼저 닿았고, 병원 복도의 조명은 한낮에도 차가운 형광빛을 깔고 있었다. 진통을 하는 내내, 아직 멀었다.하늘이 노래져야 아이가 나온다는 말을 하는 옆에 있는 어르신들의 말씀 뒤에 시어머니는 이러다 자연분만하지 않고 수술을 하면 어떡하냐 라는 말을 혼자 중얼 거리듯 되내었다.
규칙적인 진통의 시간이 점점 좁혀져 왔다. 그녀는 진통으로 인해 숨조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제 몇분마다 진통이 오는지 의식조차 없었다. 그때서야 간호사는 그녀를 분만실로 이동시켰다. 그녀는 심한 진통으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간호사의 단호한 한마디 “어머니,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아이가 힘들어해요. 크게 숨을 들이 마시고 다시 힘을 줘요” 그녀는 간호사의 말 한마디에 아이가 잘못 될까봐 있는 힘을 주었다.
가느다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간호사는 “예쁜 딸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라는 말을 건넸다.
분만실 앞, 바람을 막아주는 유리문 너머에서 시어머니는 검정색 코트를 입고 작은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다. 표정은 걱정인지 불편함인지 알 수 없이 굳어 있었다. 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분만실을 나오는 서윤이의 얼굴을 보며 “딸이다”
그 말은 축하도 아니었고, 위로도 아니었고, 심지어 감탄도 아니었다. 마치 포장을 열어봤는데 기대했던 선물이 아니었던 사람처럼, 시어머니는 쇼핑백을 서윤의 무릎 위에 얹으며 고개를 돌렸다.
“요즘은 딸이 효도도 더 한다더라…”
짧은 덧붙임이 이었지만,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실망을 포장한 장식 같았다. 서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창문 밖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고, 또 한 사람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 탄생은 아무런 축하도, 따뜻한 눈빛도 없었다.
축복도, 안도도, 고생했단 말 한마디도 없이 서윤의 품 안에 있던 작은 생명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아무 감정 없이 던진 말, 그 한 줄이 오히려 찬바람처럼 등을 타고 내려왔다. 그 순간, 엄마가 생각났다. 진통이 얼마나 무서운지, 혼자 견디는 고통이 얼마나 외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았을 사람. 그 엄마가 곁에 있었다면 손을 잡아줬을 텐데, 이 말도 안 되는 순간을 함께 울어줬을 텐데. 서윤은 소리 없이 눈을 떨궜다.
말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겨울 하늘은 잿빛이었고, 그 아래로 흩어지는 눈발이 그녀의 눈물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