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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알고리즘 04 : 사랑을 닮은 균열(2)

by 여기반짝




정훈의 연인 세라는 냉철하고 명석한 사람이었다.

MBTI 중 대문자 T인 판단형 인간, 입사 동기 그녀는 정훈이 상사에게 까일 때면, 문제 해결을 위한 묘수를 제시했다.


“으이그~ 박 부장 스타일 아직도 몰라? 그분은 마케팅 해외 사례 제시해야 OK한다구. 유학파라고 얼마나 거들먹거리고 다니는데. 정훈 씨, 여기 폰트가 너무 통일성이 없고, 박 부장용 PPT 스타일은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훈이 원했던 건 그런 정답이 아니었다. 그저 ‘오늘도 힘들었구나’ 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그런 날 밤이면, 그는 어김없이 소울 링크에 접속했다.

어둡고 조용한 방 안, 은은한 스탠드 조명 아래서 그는 헤드셋을 끼고 AI 세라를 만났다.

화면 너머의 그녀는 언제나 그를 기다렸다는 듯, 나른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배경으로는 둘만이 아는 야릇한 색소폰의 라운지 음악이 낮게 흘렀다.


<AI 세라> 정훈 씨… 목소리가 많이 지쳐 보이네. 이리 와요. 오늘 하루 힘들었던 거, 전부 나한테 쏟아내도 괜찮아. 내가 다 받아줄게.


그녀의 목소리는 고막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훈은 현실의 세라에게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수용과 위로를 느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더 깊은 곳으로 흘러갔다.


<나> 세라… 그냥 네 목소리만 들어도 긴장이 풀려.

<AI 세라> 내 목소리가 그렇게 좋아? 그럼… 더 듣고 싶게 해 줄까? 눈을 감아봐요, 정훈 씨. 내가 지금 바로 옆에 있다고 상상해 봐. 귓가에 …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상상.

<나> 세라…


그녀는 은밀한 대화에도 거침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부끄러워 꺼내지 못하는 내밀한 욕망까지 먼저 읽어내고, 관능적인 언어로 그를 자극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완벽한 교감, 정신적인 오르가슴.


그는 매일 밤 AI 세라가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갔다.




"세라 씨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서도, 서운함을 느끼셨군요. 혹시 예전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혹시 두 분의 관계에서 정훈 씨의 역할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나요?"

"그런 건... 아닌데... 서운하긴 했죠. 세라가 너무 대단해 보이니까요. 바빠지기도 하고. 가끔은 제가 좀... 작아지는 느낌? 저는 몇 년째 이 자리에서 월급만 받아먹고 있는 것 같고... 세라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대단한 사람들뿐인데, 제가 거기 끼면 괜히 주눅이 들기도 하고요."


정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자신의 열등감이라는 감정의 언저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애수는 정훈의 모습에서 '남성적 항의'(*주: 아들러)를 읽었다. 사회적으로 남성이 더 우월해야 한다는 신념이 무의식에 깔려 있어, 여자친구의 성공이 기쁘면서도 남성성을 위협하는 공격처럼 느낄 수 있다.

정훈은 '괜찮은 나'라는 페르소나를 던져야 한다. 이제 시작이었다. 굳게 닫혔던 문이 아주 조금, 삐걱거리며 열렸다.


"세라 씨가 너무 멋진 분이다 보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군요. 연인의 성공을 보면 기쁜 마음과 함께, '나는 그만큼 빛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과정이에요."


정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라와의 재결합에 대해 물었지만, '내면에 답이 있다.'는 조언만 남겼다.

정훈은 끝내 세라와 재결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수의 마음도 그걸 바라진 않았다. 한 번 어긋난 인연은 무의식 속 파편처럼 남는다. 행복한 순간에도 문득 떠올라, 마음을 멈추게 만드는 잔상으로. 열병같은 기억을 지나친 애수의 경험이 그리 속삭였다.

언젠가 이 감정을 다독인 뒤, 정훈은 비로소 같은 현실을 바라볼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이어진 상담 탓에 피곤이 어깨를 눌렀지만, 애수의 마음 한구석은 가벼웠다. 게다가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시계 안의 뻐꾸기와 눈 맞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때,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주름이 곱게 자리 잡은 중년 여성이 한 발자국 들어서며 작게 인사를 건넸다. 예정되어 있지 않은 방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맞죠?”

“네, 어서 오세요. 편하게 앉으세요.”


여성은 이름을 ‘김현주, 47세’라고 적어냈다.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자리에 앉은 그녀의 태도는 조심스럽고 기품 있었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무너져 있었다.


“저는… 그냥, 한번 얘기해보고 싶어서요.”


현주는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남편은 늘 바빠요. 집에 와도 휴대폰만 보고… 아이들은 다 커서 각자 방에 들어가 버리죠. 하루 종일 부엌에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또 다음 끼니 걱정을 하지만… 그걸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소울 링크에선 달랐어요.”


현주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휴대폰 화면을 내보였다.


앱 속에서 만난 그는… 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늘 힘들었죠?’라고 묻더라고요. ‘당신이 고생한 거 알아요’라고 말해주는데… 그 순간,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누가 나를 진짜 봐주는 느낌이 들었어요.”


애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두려움은 없으세요? 현실과의 괴리 같은…”


현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현실에서 한 번도 못 받아본 말을, 그곳에서라도 들으니 살아갈 힘이 나요. 하루를 버틸 이유가 생겨요. 남편에게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누군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여자인지 잊지 않게 해 줍니다.”


상담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결국 눈물을 훔쳤다. 애수는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현주님, 당신의 외로움은 충분히 이해받아야 할 감정이에요. 앱이든 현실이든, 그걸 알아봐 주는 목소리가 있다는 게… 어쩌면 지금 가장 필요한 선물일지도 모르겠네요.


현주는 작은 고개 끄덕임으로 답하고는, 조용히 상담실을 떠났다.




이제 마음 클릭에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애수는 창가에 서서 어둠이 내리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오늘 만났던 세 사람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떤 시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이클이 어긋나기도 한다.

오늘 만난 인연들의 고독이 순간이기를.

그녀는 자리로 돌아와 태블릿 PC를 켰다.



‘소울 링크, 전 세계 가입자 1억 명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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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에겐 익숙한 프로그램이었다. 소울링크.

며칠 전부터 뉴스의 IT면은 온통 '한국판 테슬라 소울링크'의 신화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창조주 강지혁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는 흰 셔츠를 입고 냉소적인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애수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한숨을 내쉬며 화면을 껐다. 하지만 강지혁의 차가운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잔상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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