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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장] 환절기

서덕준 시

by 여기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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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의 독백이 있습니다.

상대에게는 그저 ‘찰나였을 뿐인데’, 나에게는 그 순간이 폐부 깊숙이 박혀버렸습니다. 그 찰나는 나의 ‘여생’ 전체와 등가교환을 요구합니다.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풍경을 망친 구원자이자 침입자죠.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인연' 중에서



‘앓는다’의 의미는 단순한 그리움의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연신 콜록대며’라는 표현은, 이 기억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터져 나오는 육체적 증상임을 고백합니다. 잊었다고 생각하며 걷다가도, 비슷한 공기의 냄새에 혹은 그 계절의 온도라는 트리거에 발작처럼 반응해 버립니다.


이처럼 혹독하게 앓고 있는데, 그 누군가는 아픔을 알고 있을까요?

어떤 기억은 공평하지 않더랍니다.

현실의 인연 아닌 상상 속의 행복이더라도 끝끝내 상실하고 싶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이 있죠.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연인의 기억을 삭제하려 합니다. 기억이 삭제되는 과정은 마치 시한부의 풍경 같습니다. 클레멘타인과 함께 있던 서점의 책들이 사라지고, 몬탁 해변의 집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행복했던 기억의 지도가 조각나는 바로 그 순간, 조엘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외칩니다.


"제발 이 기억 하나만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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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환절기'.

‘너를 앓는 일이 잦았다'는 화자는 자신의 고통이 불치의 병증임을 고백하고 있어요.

물론 자의에 의한 불치이겠죠. 영화의 조엘이 모든 것을 알고도 다시 "Okay"라고 말하며 사랑을 선택하듯, 시적 화자 역시 그 기침을 멈추지 않고 여생을 살아가기로 합니다.


이 잦은 앓음이야말로 찰나를 영원으로 간직하려는 '가장 불공평한 사랑'이겠죠.


가을이라 로맨스 영화를 찾고 싶어 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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