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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장] 어느새

최영미 시

by 여기반짝










사람마다 생체 리듬이 다르겠지만,

저는 하루와 일 년과 업무 수행의 사이클이 정비례합니다.

대가는 나중에 치르더라도 일단 부딪혀 보자는 마음이 봄의 열정이었다면,

9월 즈음엔 사회의 속도에 어느샌가 나를 맡겨버리고 있더라고요.


이렇게 나를 조금씩 지워나가는 걸 성숙이라는 말로 자아를 토닥이지만,

‘의식주에 충실한 짐승’이 되어가는 건 아닌가...

어느 순간 소스라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시적 화자처럼 어쩌면 ‘시대의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지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어진 업무를 형벌처럼 해치운 후, 좋아하는 음악으로 마음의 모서리를 가다듬어가며 말이죠.(요즘 제 음악 친구는 '소수빈'입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월요일을 기다리던 어느 주말.

마음은 별나라에 둔 채 공원을 빠르게 걷고 또 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흘러내린 버즈 때문에, 그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쏴아아 아...'


샤워처럼 쏟아지던 풀벌레 소리.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그 마음이 제게로 건너와

무심코 지나쳤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모니터의 흑백 텍스트와 업무 메신저 사이 한없이 건조한 마음이 그 소리를 타고 녹아내렸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 속에서 화자를 바라보던 ‘당신’이 꼭 사람일 필요가 있을까요?


책장을 넘기다 심장을 내려앉게 한 문장

길모퉁이 담벼락에 핀 작은 들꽃


'꿈꾸는 자의 은유를 사치'라 부르는 사람을 ‘비스듬히 쳐다보며’

세상은 여전히 살아있고 너 또한 살아있다고 말을 건네는 모든 존재.

그가 바로 시적 화자의 ‘당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는 그 순간이란,

제게는 풀벌레 소리가 밀물처럼 스며드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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