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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알고리즘 12 : 당신의 주파수

by 여기반짝


네 번째 상담 세션.


지혁은 보고서도, 투지도 없이 '마음클릭'에 나타났다.

소파에 앉은 그는, 그저 애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의 복잡한 사고회로에는 지난밤의 잔상이 그림자처럼 남아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축 늘어진 하얀 팔과 갈색 머리카락. 몸을 파고들던 둔탁한 충격과, 한 박자 늦게 코끝을 스치던 비릿한 냄새. 아득하게 들리는 사이렌 소리.


'분명 오작동이야.'


칼에 맞을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였다. 그것도, 신애수를 향해.

그는 자신의 시스템에 발생한 원인 모를 버그를 찾아내려는 듯,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좇았다. 손끝, 시선, 미세한 숨의 변화까지.

이 불쾌한 감정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이 낡아빠진 곳에서 상담을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 차는 루이보스로군요.”


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엔 라벤더, 처음엔 캐모마일. 전부 카페인이 없는 허브티. 의도된 겁니까, 아니면 그냥 취향입니까?”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애수는 숨겨진 날을 느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담담히 대응했다.


'오늘도 직업 정신 한 번 투철하시군.'


그러나 찻잔을 든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지혁의 예민한 시선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자꾸 그의 오른쪽 어깨로 향한다는 것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글쎄요, 둘 다?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아서요. 흙냄새랑 비슷한 루이보스가 당기더라고요.”

“비논리적이군요. 강수 확률 20% 이하의 맑은 날씨입니다.”

“제 무릎 관절은 슈퍼컴퓨터보다 정확해요.”


애수는 농담처럼 받았지만, 지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분석을 이어갔다.


“당신의 상징은 ‘비논리’와 ‘비대칭’입니다. 제각각인 단추, 심지어 책들도 뒤죽박죽 꽂혀있죠. 도시 뒷골목의 낡은 건물 꼭대기 층. 완벽한 익명성을 보장하지만, 동시에 야망은 없어 보이는 입지 선정. 자유분방함을 위장한, 계산된 연출입니까? 순수하게 보이고 싶었어요? 남들이 감싸주고 싶게?!


그는 그녀를 하나의 데이터로 보고 있었다.

그 패턴을 완벽히 읽어내야만 했다. 누군가를 위해 몸을 던진 행동에,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원인을 모르는 버그는, 처리할 수 없으니까.


애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은 그가 과거를 회상하고 내면을 직시하는 과정이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의 과거보다,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그의 현재가 더 궁금했다. 게다가 그녀는 내담자에게 진심을 숨기는 데에는, 이미 익숙했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제 저녁 메뉴는 무엇이었는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는 없는지, 그리고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상담을 빙자하여 하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였다.


“지혁 씨, 대단하네요. 그럼 제 주파수는 읽으셨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 분석이 끝났나요?”

“아직. 결정적인 데이터가 부족하군요. 당신의 핵심 코드, 당신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욕망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내면, 날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애수의 질문에, 지혁은 처음으로 대답이 막혔다. 그의 어깨로 향했던 애수의 시선이 비로소 지혁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현재를 진단했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욕망, ‘코나투스’를 가진다고 했어요. 지혁 씨의 코나투스는 ‘완벽한 통제’겠죠.”


애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상담사의 가면을 썼다. 하지만 이 질문은, 어쩌면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럼 저는 어떨 것 같아요? 한번 맞춰봐요, 천재 개발자님.”


지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신애수라는 사람을 알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데이터 말고 그냥 사람으로.






그들의 이상한 체스 게임은 주말에도 이어졌다.

지혁은 제법 익숙하게 보호소의 작업복을 입고, 견사를 청소했다. 여전히 '이 똥 덩어리들!'을 외치지만, 처음 같은 허둥거림은 없었다.


봉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 즈음 보호소 회복실 쪽이 유난히 소란스러워졌다. 구석진 곳에 있던 늙은 리트리버 ‘바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바다는 몇 년 전, 주인이 병으로 죽은 뒤 바닷가에 버려진 개였다. 그 후로 좀처럼 봉사자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숨을 잘 못 쉬어요! 쌕쌕거려요!”


봉사자 한 명이 외쳤다. 애수가 달려가 바다의 상태를 살폈다. 개의 호흡은 가빴고, 잇몸은 창백했다. 위급 상황이었다.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


소장은 출장 중이었고, 다른 봉사자들은 낡은 트럭뿐이었다. 쇼크 상태의 늙은 개를 트럭에 태워 이동하는 것은 위험했다. 지혁이 나섰다.


“내 차로 갑시다.”


그의 테슬라 모델 S 플레이드가 보호소의 흙바닥 위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뭘 꾸물거리는 겁니까! 시간 없어요!”


플레이드의 뒷문이 열리자 지혁은 '이탈리아 장인이 바느질한 트레이닝 상의'를 시트에 깔았다. 그리고는 애수와 함께 조심스럽게 바다를 차에 태웠다. 애수는 뒷좌석에서 바다를 끌어안아 진정시켰고, 지혁은 자율주행 모드를 끄고 직접 스티어링 휠을 잡았다. 그의 차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24시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수술은 길어졌다. 위확장으로 인한 염전. 1분만 늦었어도 위험했다고 했다.

병원 대기실의 차가운 의자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혁의 비싼 향수와 병원의 소독약, 그리고 옷에 밴 흙먼지 냄새가 공기 중에 섞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고마워요."


애수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녀는 지혁이 불편해하는 자세를 흘깃 보고는, 다시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덧붙였다.


"… 바다, 구해줘서요."


거기까지였다.

악몽 같던 그날의 시간 이후, 병실에서 혼자 눈떴을 때, 그는 이미 퇴원하고 없었다. 살았다는 안도감 이후, 진심을 담은 애수의 메시지에 답은 오지 않았다. 이 애틋한 마음이 고마움인지 아니면, 그보다 뜨거운 감정인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나를 여러 번 구하네요.'


애수는 속마음을 삼키며, 시선을 수술실 문에 고정했다


“의외네요. 비효율을 경멸하시는 분이.”

“죽어가는 생명을 방치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건 없으니까.”


지혁은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애수는 그 너머의 마음을 이제야 읽을 수 있었다. 그건 강지혁의 데이터와 그와의 대화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체였다. 그는 스티어링 휠을 잡은 내내, 단 한 번도 과속하지 않았다. 모든 방지턱을 바다가 놀랄까 봐, 거북이처럼 기어서 넘었다. 데이터와 효율을 말하던 남자의 가장 비효율적인 모습. 어느 쪽이 그의 진짜 데이터일까.


“왜 그렇게까지 해요, 봉사활동?”


불현듯 지혁이 물었다.

내담자 아닌 강지혁이라는 남자가 신애수라는 여자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이었다.


“글쎄요… 빅터 프랭클이 그랬죠. 인간은 의미를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저는 여기서 의미를 찾아요. 아무 대가 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법, 상처를 보듬는 법… 그리고 살아있다는 감각이요. 지혁 씨는, 어디서 그런 걸 느껴요?”


지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완벽한 코드, 치솟는 주가, 세상의 찬사.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주었던가. 그는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모든 게 그렇게 간단합니까?”


목소리에 옅은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애수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틈.


“아니요. 저도 매일 길을 잃어요. 그래서 카드에게 묻잖아요, 어디로 가야 하냐고.”


지혁은 픽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처음 보이는 진짜 웃음이었다.





다음날 새벽, 지혁은 자신의 사무실 통유리창 앞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바다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의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회사의 주가와 사용자 데이터가 쉴 새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늙은 개의 눈빛. 옆에서 개를 끌어안고 '괜찮아, 괜찮아'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나도 매일 길을 잃어요'라고 말하며 웃던 그녀의 얼굴.


그는 처음으로, 신애수라는 여자의 ‘주파수’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분석 가능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정답도, 효율도 없는, 그냥 살아있는 것들의 시끄럽고 따뜻한 소음 같은 것.


지혁은 스크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화려한 데이터의 강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손에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듯한 흙먼지의 감촉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녀의 체온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소울 링크’의 관리자 페이지에서, AI 모니카의 페르소나 생성 창을 열었다.


‘비효율적이고 무모한 성격, 친화력이 있다. 덜렁댄다.’


를 입력했다. AI 모니카에 애수의 말투를 입히면 어떨까.


‘따뜻하다. 안고 싶다. 보고 싶다.’


그러나 모든 문장들은 저장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에, 삭제할 수 없는 데이터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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