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클릭의 문이 대여섯 번 여닫힌 후, 애수는 텅 빈 공간에 홀로 남았다.
오후의 평온 속, 탁자 위 휴대폰 화면에는 어젯밤 지혁이 보낸, 서툰 문장이 그대로 떠 있었다.
[저녁. 먹었습니까?]
수십 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지만,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상담사로서의 윤리보다, 기억의 그림자가 그녀의 손가락을 멈춰 세웠다.
'이것도 시작일 뿐이야. 사소한 문자, 어색한 저녁, 그리고 익숙해질수록 깊어지는 감정. 그러다 어느 날, 모든 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거지.'
과거의 상처가 망령처럼 속삭였다. 그녀는 두려웠다.
그녀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상담소의 문이 열렸다.
오늘의 마지막 내담자였다.
그녀는 보통의 내담자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흐트러짐 없는 단발머리, 몸의 곡선에 들어맞는 샤넬 트위드 재킷, 손에는 에르메스 버킨백.
40대 중반의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전형이었다.
민서는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저는 무엇을 잃었기에 이런 공허함을 느끼는 걸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말끝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악바리로 유명했어요. 그리고 국내 최고라 불리는 대학에 갔죠. 30대에는 남자 동기들을 제치고 업계 최연소 임원이 됐습니다. 40대인 지금, 저는 강남에 제 이름으로 된 빌딩을 가지고 있고, 제 기사는 잡지에 실려요. 모든 걸 가졌습니다. 제가 계획했던 모든 것을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단정하게 네일아트된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더 이상 웃음이 나지 않아요. 저는…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박민서라는 세 글자 뒤에 붙는 직함과 성과들을 다 지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기분이에요.”
애수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민서의 이야기는 지혁의 세계와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모든 것을 데이터와 성과로 증명하려는 삶. 완벽한 알고리즘을 구축했지만, 정작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개발자.
“스스로가 하나의 잘 만든 프로젝트 같으셨군요.”
애수의 말에, 민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맞아요. 저는 제 인생을 경영한 거죠. 이제는 회사에서 더 오를 만한 직급은 없어요. 이렇게 저는 그냥… 멈춰버린 기분이에요."
애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민서에게 어떤 해답도, 분석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낡은 타로카드 덱을 그녀의 앞으로 밀었다.
“민서 씨, 지금 민서 씨에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질문인 것 같네요. 카드에게 한번 물어볼까요?”
민서는 단호히 타로카드를 밀어냈다.
"선생님, 장난하십니까? 제 인생의 모든 성과는 철저한 계획과 데이터 분석에서 나왔어요. 결혼 못한 여자에 대한 시선과 제 자신에 대한 불신, 마치 불의에 맞서듯이 제 모든 걸 걸고 싸워 왔어요. 근데! 타로카드라니... 하, 무책임한 처방이군요."
그녀의 날카로운 저항에 지혁의 얼굴이 겹쳐졌다.
애수는 당황하는 대신,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죠. 비논리적이죠,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애수의 예상 밖의 동의에, 민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애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번 뽑아보는 거예요. 민서 씨의 그 완벽한 논리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지."
민서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카드 한 장을 뽑았다. 애수가 카드를 뒤집자, 절벽 끝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그림이 나타났다.
[ 0. The Fool (광대) ]
“광대 카드네요.”
“광대요? 제가... 어리석다는 뜻인가요? 후... 원더우먼을 연기해 온 제가 광대처럼 보이는군요.”
민서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묻어났다. 애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달라요. 타로카드에서 광대는 0번, 모든 것의 시작을 의미해요. 그는 가진 것도, 정해진 목적지도 없어요. 그저 발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하늘을 보며 첫걸음을 내디딜 뿐이죠. 이 카드는 민서 씨에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애수는 민서의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민서는 오랫동안 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서서히 물기가 번졌다. 완벽하게 통제되던 그녀의 세계에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애수는 그녀에게 휴지 한 장을 뽑아 건넸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계획하고, 너무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살아오셨다고. 이제는 모든 계획과 지도를 내려놓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한번 걸어보는 건 어떠냐고 묻고 있네요. 비효율적이고, 의미 없고, 예측 불가능한 첫걸음을 내디딜 용기가 있냐고요.”
"그러네요. 욕심이었어요. 제 인생에 또 뭔가를 채우는 게 답이라 생각했어요. 움켜쥔 손가락 하나 펴지 못하면서."
깊은 심호흡 끝에 민서가 돌아가고, 애수는 카드의 의미를 곱씹었다.
광대는 묘한 눈빛으로 애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효율, 의미 없음, 예측 불가능'.
그 단어들은 애수의 마음에도 파문처럼 번졌다.
그것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설명하는 모든 단어였다.
스스로가 과거의 굴레에 매인 채, 지혁과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시도였는지 깨달았다.
애수에게 지혁은 그냥… 뛰어들어 부딪히는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마치 이 광대처럼.
그녀는 ‘광대’ 카드를 집어 들었다.
절벽 끝에서, 두려움 없이 첫발을 내딛는 자유로운 영혼.
그녀는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그가 보낸 짧은 문장이 떠 있었다.
[저녁. 먹었습니까?]
상담사로서의 규칙, 과거의 상처,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금 전,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비효율적이고, 의미 없고, 예측 불가능한 첫걸음을 내디딜 용기가 있냐고.
애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천천히 한 글자씩 입력하기 시작했다.
광대의 첫걸음이었다.
[네. 아직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