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에세이 경계에서-
sorrow
비가 울음처럼 내리는 밤, 사내는 막막하게 가고 있었고
여자가 다가와 팔장을 끼며 유혹한다.
사내는 구름처럼 힘을 놓아버리고 여자에게 끌려 가버린다.
그렇게 도피해 버린 하룻밤,
아이를 배속에 가진 채 매춘을 했던 그 여자는
슬픔을 위한 물감이었을까?
죽을힘을 다해 짜야, 한 방울 나오는 목숨!
그날은 생에 긴 정전이 일어났다.
이미 두 번의 사랑을 실패했던 고흐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 여자와 동거에 들어갔다.
이미 다른 사내의 아이를 임신 중인 여자와 다섯 살 난 낯선 계집아이
그리고 날마다 물감에 굶주려 있었던, 무기력한 사내는
슬픔에 찌든 가족으로 조립되었다.
배고픔에 길들여진 이들의 동거는 체념하는 일부터 배우게 된다.
슬픔과 슬픔들이 아프게 모자이크되면서 더 큰 슬픔이 태어났다.
작은 충격에도 깨져버릴, 유리그릇 같은 일상에 대하여
깊은 상처로 그림을 그리는 날은
까마귀들이 먼저 알아채고 달려들었고
막 부풀어 오른 슬픔들이 기침을 해댄다.
이 지독한 동거는 마지막 의식을 위한 숨고르기였을까.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그 시간을 향해……
슬픔, 더 깊이 파고들어 간 a hidden sorrow에 대하여
그는 온몸으로 어둠의 막장을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절망 끝에 서면
절망이 절망을 교묘히 속인다.
시엔의 누드, 배속에 또 하나의 생을 잉태한 그녀를 그리고 싶었던 그때는
생의 눈금이 바닥을 칠 무렵,
그래서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슬픔을 잉태한 그 누드,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절망의 혀를 깨무는 그녀의 모습,
물음표처럼 휘어진 그녀가 생에게 절박한 질문을 하고 있을 시간에
고흐가 스스로 시들어 가고 있었다면
발가벗겨진 이 아픔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
그 전시장 첫 번째로 걸려있던,
갈라 터진, 핏 빛 입술 같은 sorrow를 보고 난 후
다른 그림들 앞에서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아름다웠던 그의 다른 그림들에게 차마 환호를 건넬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첫 번째로 걸려 있었을까?
-고흐를 만나고 온,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