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에세이도 아닌, 그 무엇-
꺼억 꺼억 먹어치워야 하는 이유
커피를 마시다가도 이 시간도 생의 일부분일까?
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지만 사실은 커피가 나를 마시고 있었다면,
커피가 쓴 이유가 내가 녹아있기 때문이라면
분명 심각한 일이 되고 만다.
사소한 것들까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버리면
생의 농도는 그만큼 짙어지면서 또 다른 오해를 낳을지도 모른다.
거부할 수 없는 생은 먹어야만 하는 약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사소함이 생을 통째로 바꾸어놓는 일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물고 온다.
바람이 바람 이상이었다면
분명 바람의 의미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
언젠가 누가 내 아이디를 훔쳐다가 나쁜 짓거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 이유로 온라인에서의 내 기능의 일부가 차단된 적이 있었고
이해도 되지 않는 사소한 일로 생을 또 소모했었다.
시집 출간을 위해 몇 달 동안 밤을 지새우며 글쓰기에 몰입했고
시간개념마저 잃어버렸었고 나는 시의 노예가 되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허공을 떠다니는 소금쟁이거나
새와 상관없는 허수아비거나
한 줄 문장처럼 몇 날 며칠 누워있어야 했다.
세상 빛을 본 그 책이 내게 그 시간들을 돌려주었을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내 약력에 한 칸이 늘어난 것은 맞지만
그 시집이 꿈속까지 따라와 나를 비웃고 있다면
게다가 불미했던 일들은 내 약력에 끼어들 틈이 없다.
가령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던 시간들은 엄밀한 내 비망록에 기록되었을 뿐이다.
비망록에도 들어오지 못한 일들은 내 주변에서 서성거리다 사라진다면
또 그만큼의 생을 버린 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은 무덤 수십 개가 있다
불합격통지서와 너무나 불쌍했던 엄마의 눈빛,
그리고 그립다며 사기 친 서정들까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내 기억에 묻혀있다면
나는 통곡을 위한 묘비 아래 숨어있는 작은 짐승,
그 짐승은 생의 슬픔도 먹이로 알고 있었고
생을 너무 많이 소모한 날은 아파했던 일들만 바닥에 가라앉아 있어서
씻어내는 일도 아픔이었다.
그리고 몇 날 며칠 비가 내리길 기다려야 했었다.
아픔이 잦은 생일지라도
분명 버리기 아까운 음식 같은 것이다.
꺼억 꺼억 먹어치워야 한다는 이유로,
글&사진. 김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