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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눅진한 브라우니 Sep 22. 2024

벌새

영화 이야기

살아가는 것에 대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였다.

시간에 맡기면 그저 유수처럼 흘러가버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훌쩍 커버린다.
훗날 과거의 사람, 과거의 장소가 그리워지고 그때의 내가 애틋해질 때가 있다.
참 이뻤다.. 영화 벌새의 은희를 보며 그녀만 한 시절을 지나온 이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딸아이는 다른 차원에서 흥미를 느꼈는지 졸지도 않고 끝까지 영화를 봤다.

좋든 안 좋든 내 앞에 떨어진 현실을 묵묵히 사는 시간들이 모여 나의 역사가 만들어져 간다.
삶은 거창할 것도 없이 그저 견딜만하면 살아지는 것.
공부가 하기 싫으면 하기 싫은 대로 수업시간에 몰래 딴짓하면 되고
스펠링 틀렸다고 숙덕거리는 아이들이 있거나 말거나 신경 안 쓰면 그만이고
부모님을 도와 휴일 새벽부터 방앗간에서 떡 만드는 일을 돕고 그날의 벌이를 세어 보고
원수 같은 오빠가 부려먹으면 몇 번은 들어주다가
반항하고 그러다 몇 대 맞으면 몇 번 맞고.. 전날 요란하게 싸우던 엄마아빠가 다음날은 웃으며 같이 드라마를 보고.
그저 견딜만하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구나.. 하고 살다 보면 다시 올 수 없는 과거가 하나씩 하나씩 쌓인다.

별 관심도 못 받는 나를 마냥 귀엽다고 봐주는 남자 친구가 있어서 즐겁고 나를 추앙하듯 따라다니는 후배가 있어서 어안이 벙벙해지고.
당의 입힌 순간들을 입 안에서 굴리다 보면 당의가 벗겨지고 쓴 맛이 올라오듯 하루아침에 변심하는 이들에 마음이 허전해지고.

뭐가 뭔지 모를 때 이해의 시선으로 봐주는 이를 만나는 건 큰 행운이다. 살다 보니 그런 이를 만나기도 했건만... 표현을 못하거나 알아채지 못하거나 혹은 (가장 안타깝고 슬프게도) 속물적인 계산으로 낮게 치부해 버리거나... 그런 경우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을 알아보는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려면 그만큼 인정도 받고 사랑도 받아야 했을까?
사랑을 느끼는 건 개별적인 특성에 의해 미세하게 알아채거나 못 알아채거나의 차이도 있고..
얘기하자면 이것만큼 복잡다단한 것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은희는 어린 만큼 단순하기도 해서 한문 선생님을  직시할 줄 알았고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담대함도 있었다.
그게 은희의 복 같았다.
늘 바쁘고 사는 게 재미도 없고 체념하는 일도 많은 은희의 엄마는 어느 날 자신이 지글지글 부쳐준 빈대떡을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은희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녀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 은희가 엄마를 닮아서 이쁘구나..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며 살기엔 인생들이 녹록지가 않다. 드러나는 것들이 투박하기도 하고.
그걸 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은희가 빌려준 책과 스케치북 그리고 편지를 소포로 보낸 영지 선생은 소포를 은희가 받았을 땐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은희가 얘기도 없이 학원을 그만둔 영지선생을, 주소 하나 달랑 가지고 집까지 찾아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자기네 떡집에서 제일 맛있는 떡을 골라서 분홍보자기에 싸서 가져갔는데 줄 수 없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도 자기 자신이 싫을 때가 있어요?
응. 나도 그럴 때가 있지.

자기가 자기를 혐오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다.
그런 걸 생각 못했는데
살면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상황들은 참 많았다. 아.. 그게 바로 자기혐오의 순간들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나도 자기혐오의 순간들을 많이 겪어 왔구나..
나이가 든다는 게 좋은 건 이런 짙은 자기혐오가 조금씩 옅어져서인가 봐. 그런 걸 자각하지 못할 만큼 굳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세상살이가 어렸을 땐 내 의지로 좌우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고 여겨지니까..라고 은희가 옆에 있다면 얘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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