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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선(線)

영화 <룩 백>

by 여름

지하철 7호선 노원역 5번 출구엔 계단이 많고, 에스컬레이터가 없어요.

엘리베이터를 타기엔 멋쩍어, 6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려요. 바닥에 초록불이 들어왔어요. 오랜 버릇은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이쪽저쪽 고갤 돌려 하늘을 봐요. 신호대기선에 멈춰 선 차들, 한껏 고갤 젖혀야 끝을 허락한 노옵따란 건물을 뒷배로 둔 가로수 나란한 6차선 도로 너머로 피어난 하늘은 이제 막 훈색이 섞여드는 푸른 빛. 호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대고 찰칵, 찰칵.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자전거 보관대 뒤로 달달하고 후끈한 냄새 풍기며 곧장 달겨드는 주황색 포장마차들은 빛바랜 사진, 잊어먹은 얼굴을 닮았어요.


포장마차 맞은편 길바닥으로 감자며 호박이며 양파며 고추며가지고 나올 수 있는 건 죄 그러모아 담은 올망졸망 파란 소쿠리 옆엔 '더숲'. 입구에 서서 간판을 한번, 올려다보고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었어요.


후욱, 찬 두 뺨 위로 버터향, 커피 향, 각종 소스 향의 반가운 입맞춤. 저녁 대신 먹을 감자 치아바타를 집어 들고 카운터에서 예매한 영화 티켓을 받아들고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지이잉, 울리는 진동벨. 커피랑 빵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천천히 서가를 둘러보다 당신이 남양주 '능내책방'에서 발견하고는 '시의 말'을 모은 책이라며 <청춘문화센터> 편에서 소개한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가 있길래 자리로 가져와 영화 상영 전까지 읽었어요. 간간이 고갤 들어, 그 겨울 우리가 앉았던 자릴 건너다보기도 하면서.


그때, 우린 알았을까요.

그 계절을 지나, 봄도 지나, 여름과 가을, 겨울을 지나…

무수한 꽃이 피고 지고, 해와 달이 떠올랐다 이지러지고, 새가 알을 까고 노랠 부르며 날아오르고, 여름내 매미가 울어대고, 귀뚜라미 울음소리 이슥한 가을밤을 건너와 지금, 여기에, 다다를지.


거기 앉아 그때 우릴 바라보는데, 한순간 우리가 지나온 모든 날들이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며 너울너울 춤을 췄어요. 그러더니 시간도, 공간도, 빛도, 어둠도, 바람도, 소리도, 없는, 어떤… 선물의 세계로, 데려갔어요. 저는, 지금, 거기, 있어요….


선물은 지금 받겠다는 당신.

그렇게 말한 당신 등을 바라보며 당신이 걷고 또 걸었을 길을 따라 걸으며 당신 발자국 위에 제 발을 슬몃 덧댄 그 시간이 제겐 선물이었어요.


선물은 됐다며 한사코 손사래 치던 당신.

그런 당신이 남겨둔 목소리와 글과 스윽스윽, 그린 을 따라나선 여윈 밤과 검푸른 새벽녘, 그 시린 고요가 제겐 선물이었어요.


어느 여름엔 냉동실 가득 옥수수를 얼렸어요.

퍼얼~펄 흰 눈 나리는 겨울 한복판, 모락모락 피어나 토옥톡, 터지며 노오랗게 물들 입속 여름날을 꿈꾸며.


팟캐스트를 시작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목소릴 듣다 문득, 알았어요.


냉동과 해동 없이, 그러니까 얼렸다 녹였다… 하는 번거로움과 성가심 없이도 바로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기똥차게 맛있는 순간이 있어! 들을 때마다 다른 색깔, 다른 맛, 다른 낯빛이 여기, 있었어!


그리고 저는 또, 알았어요.

저란 사람은 허공에서 수줍어 비켜가는 눈빛 보단 주파수를 타고 건너와 고막을 떨리게 하는 목소리에 더 오래 진동한다는 걸. … 어둔 밤에만 켜지는 등불이었어요. … 적적한 초저녁 이불속에서 남몰래 새겨둔 이에게 꾸욱 꾹, 눌러쓴 글씨였어요. 눈빛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빛조각이라면 목소리는 교교한 밤바다 어느 기슭 훔치는 물결이었어요. 팟캐스트를 들을 적이면 출렁출렁, 너울너울, 넘실넘실… 젖어가는 걸, 당신은 알았을까요. 당신 그물에 낚인 그 비늘은 제게로 와 펄떡이는 은빛으로 재생된다는 걸!


하마터면 시간의 떠밀림에 기억 저 너머로 사라졌을 (이토록 반짝인) 순간을 건져 올려 편집하고 개성 넘치는 그림까지 그려 맛깔나게 차려준 동선 작가님,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매끄러운 진행과 사랑스러운 댓글에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아드는 오프닝 멘트도 감사한데 전국방방곡곡 비눗방울처럼 퐁퐁, 뛰댕기느라 하루 24시간도 모자랐을 폴폴 작가님,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청춘문화센터> 편에서 동선 작가님은 스테이영 님의 <편지>를 소개하면서 노랫말을 읽었더랬어요.


'어릴 적 꾸던 상상 속 모든 게 꿈이 아니란 걸 믿어요. 아무도 몰라도 돼요. 그대만 안다면. 또다시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처럼 기나긴 슬픔도 영원하지 않을 걸 알기에.'


그리고는…….


'적어도 스스로 완성이 되기 위한 고민을 하는 동안만큼은 소년소녀로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어쩌면요.

한 인간으로 어떻게 완성되어 갈까,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우린 영원한 소년소녀일지도요. 푸르디푸른.


'여름, 작은 테이블 앞에서 팥이 콩한테 말했습니다.

팟캐스트 하자. 곧.

가을, 캐나다에서 출발한 마이크가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허공에 마이크 스탠드를 설치하다 떨어뜨려 이마에 딱밤을 맞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책 이야기.


“아끼는 마음”으로 “영화처럼 산다면야”.


영혼을 뒤흔든 영화, 공연, 전시 이야기.

궁금해요, 우리를 궁금해하는 여러분이. 우리 이야길 듣고 여러분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 영화 동아리 ‘오사영’ 회원 일동'

(by 폴폴.)


여름에 떠난 모험이 가을을 지나 겨울 한복판에 다다랐어요.

섬세한 동선 작가님 레이다망에 걸린 (얼린 적도 없는) 부신 주황빛 봄햇살에 찡끗, 윙크 날리는.


쌀국수를 먹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5월 대학로 그 밤거리에 저는, 있어요.

꽃처럼 화안한 당신 얼굴 바라보던 그 여름 작은 테이블에 저는, 있어요.

아파트 화단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리던 가을밤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그 책상에 저는, 있어요.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계절과 그 모든 낯빛과 그 모든 숨결과 그 모든 웃음과 그 모든 눈물과… 그 모든 목소리와 우리 셋 마주 앉아 있던 그때 그 자리에.


이시영 시인의 시구처럼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무것도 없고

지금, 여기, 스침과 섦과, 돌아옴은

세계가 변하는 일…

저기, 저 나리는 희고 흰 눈송이, 눈송이, 눈송이…….


얼마나 남았나 알 순 없어도

남아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예외 없이 선물이고

알다시피 샘쟁이에 땡깡쟁이라

1분 1초라도 더 오래 살아

한 자라도 더 쓰고 싶어요.

여기, 당신, 당신들이랑.


또 맘나요.

(오늘은 우리가 '더숲'에서 마주한 날로부터 꼭 2년.)



덧 1. 폴폴 작가님 편.


폴폴 작가님 그림자 위에 살포시 덧댄 우리 이야기….


시계방향으로, 강릉 <윤슬서림>/서순라길 <파이키>/서촌<베란다>/남양주 <능내책방>, 그리고 흔적들....


폴폴 작가님의 피땀눈물





덧 2. 동선 작가님 편.


동선 작가님의 '내가 처음' 시리즈를 듣고 저도 '만화'와 '재즈'와 '커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짝쿵 들여다봤더랬어요. 그리고 동선 작가님이 그림 그리는 과정은 봐도 봐도 신기하고 엄지 척!


동선 작가님의 '내가 처음' 시리즈 중 '재즈'에 빠지게 한 <블루 자이언트 >


동선 작가님의 '내가 처음…' 시리즈 중 '만화'


동선 작가님의 '내가 처음' 시리즈 중 '커피'


한 땀 한 땀, 동선 작가님이 새 로고를 그리는 영상


44분 17초부터 시작되는 동선 작가님의 화려한 쇼쇼쇼!


우리가 만난 지 꼭 2년 되는 날, 올라온 <첫사랑>편에서도 펼쳐진 동선 작가님의 그림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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