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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덕중 Jul 24. 2020

질주의 역사 - 7

승패는 쌀알들이 결정하지 않는다

7/ 승패는 쌀알들이 결정하지 않는다




“변호사 양반, 우리가 이깁니다.”


쌀알들이 원을 그리며 흩어져있다.


하지만 소송의 승패는 그렇게 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고인겸은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손시정의 히트곡 “헛바퀴”를 크게 틀어 놓는다. 고인겸은 꿈속에서 원형으로 흩어진 쌀알들의 환영을 본다. 고인겸은 다음날 우체국을 향한다. 사무실은 아직 인테리어 공사 중이고 아직 비서 한명 없다. 고인겸은 직접 우표를 핥아 봉투에 붙인다. 그렇게 내일 쯤이면 영월지원에 소송위임장이 도착할 것이다. 이제껏 회사원과 별반 다를 것없는 사내변호사로 지내던 고인겸이 처음으로 소송을 대리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전직장을 상대로. 자신이 직접 답변서를 쓴 사건. 


이제 승패는 쌀알들이 아닌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고인겸은 생각한다: 하늘에서 wifi가 떨어지고 차들이 스스로 주행하는 시대에 아직도 우표에 침을 묻혀 종이를 보내야 한다는 게 우습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법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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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지앞 앞 도로는 5차로였지만 평소에도 통행량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새벽 5시에 그길을 지날 사람은 없었다. 법원은 5차로 한쪽 길 끝 언덕에 세워져있다. 


전날 근처 모텔에서 잠을 설친 이규는 교차로에 서서 아직 잠들어 있는 법원 건물을 한참 동안 쳐다본다. 


시위대는 9시쯤에 두 대의 전세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70명정도가 왔다(이규는 300명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줄을지어 버스에서 걸어내려와 이규가 그어 놓은 노란줄 뒤로 줄 맞춰선다. 시위대는 팻말을 빠르게 나눠갖고,  손시정의 히트곡 “오늘밤 사랑을 위해”를 개사한 “기계는 인류를 위해”라는 노래를 때지어 불렀다(개사와 편곡은 김필립이 수고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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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그러는데… 밖에 저 분들은 돈 받고 저러는 거예요? 새벽부터 버스까지타고…”


법정에서 개정을 기다리는 강덕구 변호사가 고인겸에게 묻는다.


고인겸은 질문의 뉘앙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은 그가 크레이지 ‘담당’이니깐.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세상의 변혁을 이끌어온 사람들은 언제나 처음에는 조롱받곤 했죠.” 고인겸이 나즈막하게, 날카롭게 대꾸한다.


“아니, 진짜 궁금해서, 궁금해서 그래요.” 날카로운 반응에 강 변호사가 겸연쩍게 말을 정리한다. “아이구, 우리 고변호사님 답변서 쓰시는거 만큼이나 날카로우시네! 답변서 잘 썼어요, 아주 잘 정리하셨더만.”


“원고 입장에서 쓸 준비서면은 더 날카로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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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새가구 냄새가 빠지지 않은 사무실에서 고인겸은 본인이 회사입장에서 쓴 자신의 답변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이미 여러번. 그리고 또 여러번. 강덕구 변호사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답변서의 구성 자체도 훌륭했지만 회사가 창립시 부터 준비해둔 방어논리는 실로 뛰어넘기 어려워보였다. 고인겸은 자신이 작성한 답변서의 볼드체에 하이라이트를 긋는다. 홀로 바둑을 두는 것처럼.


"이상과 같이 계율의 제정, 수정, "몽상"과 현실에서 이뤄진 끝없는 테스트들 - 회사는 이미 현실적으로 가능한 모든 안전조치를 - 피해자(만일 그 말이 적합하다면)는 불법적으로 차량을 침탈하였고, 통제되지 않은 환경에서 - 피해자(만일 그 말이 적합하다면)가 차량안에서 무얼했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 알파는 정식으로 출시된 차량이 아니고, 따라서 피해자(만일 그 말이 적합하다면)는 자율주행차량특별법 상의 고객이 아니다 - 특별 위로금 형태로 충분한 보상이 이미 이루어졌다..."


내일 패소판결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판사가 기일을 속행한 것은... 그저 판결의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 아닐까? 고인겸의 펜은 결론 부분에 이른다.


"계율은 완전하고, 알파OS는 완전합니다"


고인겸은 이 대목에서 팬을 멈춘다. "그럼 왜 죽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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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기일에는 20대의 버스가 동원됐다. 법원 주차장이 가득차서 버스를 언덕길가에 세워둬야 할 정도였다. 


"피고는 계율과 알파OS가 완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피고는 줄곧 알파OS의 제작과정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알파OS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구체적 설명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김민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못하고 있는겁니다." 고인겸이 법정에서 핏대를 세우며 강덕구 변호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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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이 없는건가요? 기계가 오작동해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 기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필요 조차 없는건가요? 우리는 기계의 마음을 읽을 자격이 없는건가요? 계율이 두껍고 회사가 열심히 만들었으니 알파OS가 완전하다는 건 궤변입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우리의 운명을 OS에게 맡겨야 하는 겁니까? 회사가 만든 것이 OS인가 신입니까?" 


이규의 연설은 한층 선동적이다. 원래 소리를 좀 질러주기도 해야 뷰가 오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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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기일 때에는 40대의 버스가 왔다. 인파가 광장을 가득 채운다. 이규와 고 변호사는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 겨울 추위가 맹위를 부리고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그 모든 게 인중의 비장함을 더해주었다.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CNN, BBC, 알자지라, CCTV 등 주요해외 언론들도 영월지원 앞으로 기자들을 보냈다. 


"인공지능은 신이 아닙니다! 회사는 신이 아닙니다!" 


짜증이 난 정우령이 티비를 끈다. "또 헛소리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김민주 사건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회사 로고와 함께. 이미 2년이 지난 사건. 가장 불편한 사건의 가장 불필요한 디테일들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한다.


자리에 배석한 CTO 가우재가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예요. 우리가 신은 아니죠..."


"가 상무 눈치없이 또 왜 그래," 홍순기 전무가 가우재의 말을 끊는다. "회장님, 이대로라면 소송 이겨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게 얼마나 더 커질지 모릅니다. 정말 회사 접어야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모르는 거 아닙니다. 알파, 신은 아니어도 가장 신에 가까운 물건이죠. 하지만 저것들을 상대로 입증할 계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건 파는 사람입니다. 물건을 팔아야지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예요. 이 사건은 끝까지 가면 안됩니다. 애초에 시작해야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형님, 그래도 우리가 시작한 건 아니지.” 정우령 회장이 말을 끊는다. 


“무슨 말인지 알잖아요. 일이 커졌고 더 커지고 있어요.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합니다. 끝까지 할 수 없어요.” 


“위기는 오히려 기회입니다." 가우재가 끼어든다 "어차피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인거 다 알지 않았나요? 신고식, 성인식, 그런 거예요. 우리가 원하던 판이기도 해요, 이걸 위해서 계율을 만든거라고 생각합니다. 입법이 안되면 재판정에서 우리얘기를 해야죠. 재판이 잘 끝나면 알파차량이 출시될 수 있는 환경이 될겁니다.”


“잘 안 끝나면요?” 홍순기가 말한다.


“그땐 회사접어야지.” 정우령이 대답했다. “재판은 변호사들이 잘하고 있는 것 같고, 언론은 형님이 어떻게 해봐요.” 


“회장님, 일단 전부 나한테 맡겨봐요.” 홍순기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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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는 않아요?" 방을 나서면서 가우재가 홍순기에게 묻는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호기심은 사업에 도움이 안되요. 이건 가 상무 취미생할이 아니라 사업입니다" 홍순기가 못 마땅하다는 듯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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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소송 원고, 빚투 논란”


“전과 17범의 사기꾼 김학모, ‘알파소송’이 18번째…?”


“조카 유산을 도박에 탕진한 매정한 삼촌”


“죽은 형의 유산을 더럽히는 동생”


기사를 스크롤한 고인겸이 볼펜을 책상에 탁탁 거리자 김학모가 말한다: “뭐, 틀린 말은 아니예요.”


하루가 멀다하고 특종이 터졌다. 김학모의 악랄한 과거가 폭로된다. 분노에 찬 사기범행의 피해자들이 차례차례 화면을 채운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 돈이 없어 아내가 수술을 받지 못했어요.”라고 결혼 한번 하지 않은 피해자가 울먹인다. “아우, 대단하셨어요. 오시면 아가씨들 쫙다 불러서 돈다발을 뭉탱이로 뿌리시는데…” 머리에 왁스를 많이 바른 남자가 껌을 씹으며 말한다.


“말종” “꺼져라” “죽어라” “쓰레기” “사기꾼”


김학모의 철학원 앞에 빨간 페인트로 낙서를 그어졌다. 며칠 후엔 창문으로 돌이 날라들어 온다. 


“대표님, 꼭 제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는 거 잖아요. 저는 잠시 외국에 나가 있을 게요.” 김학모가 공항에서 전화를 건다. 비행기는 2시, 행선지는 대만 타이페이.


이규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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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에 대한 공격은 SNS를 통해 시작된다. 익명의 동기가 폭로한 이규 대표의 대학원생 시절 쓰레기 같은 인성. 인중의 정치적 배후. 외국 경쟁사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폭로. 일진설. 조폭연루설. 불륜설(이규는 총각이다). 여배우 스캔들설. 학력위조설. 박사 수료 주제에 '박사'를 사칭했다는 비난.


다음은 고인겸. 고인겸 변호사가 그간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인중의 이념’에 감화되어서 회사를 그만둔게 아니라 성추행으로 회사에서 짤렸다는 폭로기사가 나왔다. 로스쿨 시절부터 여자를 밝혔다는 ‘지인들’의 폭로글도 잇따라 SNS에 퍼진다. “그 새끼”의 또라이적 일화, 또라이적 성격, 머리를 잘 안감고 다닌다는 소문. 전 여친(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의 폭로. 


대부분 루머였지만 피고인 회사의 사내 변호사로서 수행했던 사건의 원고를 변론하는 것이 실제 법적이슈였다. 영업비밀과 관련되서 고인겸이 배임으로 처벌될 수 있다는 변호사들의 인터뷰도 잇따랐다. 언론이 움직이면 수사기관도 움직인다. 고인겸의 사무실이 압수수색 당한 것은 보도가 나오고 1주일만이었다. 수사관들은 사무실을 엉망으로 뒤집어 놓았다. 악의적이었다. 모니터가 깨져있었고, 상패는 조각나 있었다. 몇개 없던 사건 서류는 찢어저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고인겸이 로스쿨 시절부터 참고하던 책들도 조각나 있었다. 


고인겸은 퍼즐을 맞추듯이 조각난 책들을 이어 붙였다. 


고인겸은 핸드폰에 키보드를 연결해서 감정신청서를 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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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모에 대한 여론도 악화된다. 시위대 규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시위대에게 계란을 던진다. 시비가 붙고 몸싸움이 일어났다. 언론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고, 폭력시위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쓰레기더미를 카메라에 담았다. 시위대가 버리고 갔다고 주장한다. 버스는 중단됐다. 시위대는 “낚였다”면서 침을 뱉고 떠난다. 언론은 그들이 뱉고간 침자국을 카메라에 담았다. 


날씨가 더 추워졌고 시위대는 흩어졌다.  이규는 피켓을 들고 추위 속에 서있다.


‘미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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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원은 8번째 재판기일을 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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