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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덕중 Aug 13. 2020

질주의 역사 - 8

...그리고 남은 것은 소송이다

8/ ...그리고 남은 것은 소송이다






겨울이 왔다. 차가워진 사무실을 들어서며 명예원은 겨울을 실감한다: 일정을 생각한다: 그녀는 창밖에 무언가 붙어 있는 걸 확인한다: 가까이 다가선다: 창밖에 붙어있는 전단지: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손을 만들어야 한다."


판사실 한켠에 늘어서 있는 책장, 거기를 빼곡하게 채운 법률서적들과 기록들. 자료들. 재료들이라고 하는게 맞겠다. 그걸로 판결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들, 출력된 의견서들, 호소, 뉴스거리, 인터넷 게시글, 해시태그, 재판정에 뺏지를 하고 들어서는 사람들. 판결의 재료들.


그리고 이것. 감정신청서.


명예원은 책상으로 돌아와 고인겸이 제출한 감정신청서를 넘겨본다.


원고: “알파OS에, 설계상의 결함이 있는지 전문성이 있는 제3자에게 조사 해달라.”


피고 회사의 답변: "그건 가능하지 않다."



-


"...원고가 주장하는 것처럼 회사가 그간 이번 사건 진실을 숨겨오려고 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회사가 개발한 시스템이고, 그게 만일, 가정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오류를 일으켰다면 그 개발자가 그걸 가장 알고 싶지 않았겠습니가? 하지만, 이미 서면으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 사고 차량의 메모리는 이미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그럼 왜 죽었습니까? 오류가 없다면? 망 김민주의 사망이유에 대해서 회사는 여태까지 제대로 된 소명을 못했습니다. 회사가 계율을 작성하고 그에 따라 알파OS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기술적 복잡성을 앞세워 감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건 단순한 게으름이고 회피입니다. 메모리가 없다고요? 해당 차량에 설치된 것과 같은 알파OS 0.983 버전은 검증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모든 자연과학적, 논리적 사항은 인간 경험칙의 한계가 있을지 언정 검증은 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이건 회사가 스스로 만든 기술입니다. 그 기술에 대한 검증을 못한다는 것은 회사가 통제불능의 괴물을 만들었다고 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가우재는 생각한다: 적절한 지적이지. 과학의 목적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한계를 확인하는 것.


그럼 그녀는 왜 여기 앉아 있는가? 재판도중 기술적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수 있으니 참석하여 설명을 해달라는 강덕구 변호사의 요청에 따라. 무언가 막히면 카톡으로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되어 있다: 물론 재판이 끝나면 영월법원 근처의 도토리묵 맛집도 들를 예정이다.


강덕구 변호사가 반박한다: "재판장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본건 차량은 상품으로 출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차는 도난당한 차량입니다. 누가 이걸 훔쳤죠? 네, 망 김민주가 무단으로 훔친 차량이죠, 하지만 차량은 망 김학주가 회사에 반납하지 않고 자신의 차고에 세워뒀을 때 이미 도난 상태였습니다. 왜 반납하지 않은거죠? 김학주는 알파OS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 알파OS를 자기 차고에서 마음대로 수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겠죠. 사고 차량에 알파OS 0.983이 깔려 있다는 것은 근거 없는 가정입니다."


명예원이 정리한다: "그러니깐, 피고 말씀은, 메모리 복원 없이 감정 자체를 할 수 없는데, 메모리 복원이 불가능하다. 이 얘기네요."


떠들썩한 법정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다.


"되는데."


가우재는 그 순간 혼잣말을 되뇌였다. 모두가 가우재를 돌아본다.


"된다고요?" 명예원이 묻는다. "어떻게 된다고요?"


"재판장님, 저, 저분을 증인으로 신청하겠습니다." 고인겸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우재를 가리킨다.


"저, 저는 그냥..." 가우재가 당황한다. 이걸 예상한 건 아니다. 그녀가 예상한 건: 도토리묵 무침.


“거기, 앉아계신 분, 이름이 뭐죠?" 명예원이 묻는다.


“가, 가우재입니다.”


“가재요?”


강덕구 변호사는 오른 손바닥으로 머리를 짚는다. 아차. 아차차.


-



“현장에서 증인으로 신청하고 신문하는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강덕구 변호사가 항의조로 열을 올린다.


“왜요? 증인을 미리 조련(?)시킬 시간이 없기 때문에요?” 고인겸이 비꼰다. “재판장님. 첫째로, 증인은 피고 회사의 임원으로 중립적 증인이 아닙니다. 다음 기일에 증인신문을 진행한다는 건 피고에게 대비하는 시간을 준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가우재씨는 핵심개발자로 본건 쟁점에 대해 증언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대체 피고가 두려워하는게 뭔가요? 본건은 한 사람의 증언으로 결론이 나는 사건도 아니고… 감정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결론 자체를 낼 수 없는 사건입니다.”


“고변호사님, AI나 프로그래밍이나 뭐 이런거 아세요? 제가 IP법만 전문으로 20년을 파왔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기술적 이해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오늘 증인신문을 진행하면 제대로 된 신문을 할 수 있습니까? 재판장님, 외람되지만 재판장님도 신문을 진행하려면 사전에 ‘공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가우재 상무님은 관리인입니다. 실무에 대해서 아는게 전혀 없어요. 제대로된 증언을 할 자격도 안되고. 준비 안하면 할말도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렇게 복잡한게 AI 뭐 이런거라고요. 오늘 저분 왜 나온줄 아세요? 저 분, 오늘 영월에서 도토리묵 먹겠다고 따라 나오신 겁니다.” 강덕구가 가우재를 가리킨다.


가우재는 생각한다: 강덕구 저 새끼가.


“‘되는데’라고 했습니다.”


고인겸이 말한다. “방금 분명 ‘되는데’ 라고 했습니다.저 분은 관리인이 모른다고요? 증언을 들어보고 판단하면 됩니다. 된다고 하면 왜 되냐고 물어보면 됩니다? 준비, 준비 하시는데, 오늘 하나만 물어보고 나머지는 다음 기일 잡죠. 안될 이유가 있나요. 자, 됩니까? 안됩니까?”


명예원은 볼펜으로 메모장에 별표를 그려 놓는다: “가우재 상무, 개발자, 증인”


“물어 봅시다.”


-

가우재는 생각한다: 몽상 시스템 속의 알파 차들은 가끔은 영월법원으로 달려 왔었을까? 그 빈도수는? 시뮬레이션은 실제 교통량을 반영하여 실행되게 설계되어 있다. 그러면 교통량이 많지 않은 영월지원까지 몇번이나 왔었을까? 수 없이도. 왜냐면 차들은 몽상 속에서 수 없이 달렸으니깐. 오늘 내가 왔던 경로대로 달려왔던 알파차는 몇대나 될까? 그녀는. 김민주가 달려온 경로를 따라 달려온 차량은?


몽상 속에서, ‘그들’은 반드시 효율적인 경로에 따라 달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든 방향을 통해, 모든 가능성을 향해, 모든 방법을 통해 질주한다. 운명같이.


“증인, 듣고 있어요?” 재판장이 확인한다.


“죄송합니다. 어제 잠을 좀 설쳐서요,”


“증인, 집중해주세요. 그러니깐 원고 질문을 좀 정리할게요: 메모리 일부가 소실되었다. 메모리 파편을 통해 복원을 해야 하는데, 가능한가. 이겁니다.”


“얼마 정도요?” 꿈 꾸는 사람처럼 말한다.


“얼마…? 몇퍼센트 말씀하시는건가요?” 고인겸이 묻는다.


“98.4%까지. 동일성을 완전히 보장받을 수 있는 범위는 91.33%까지 입니다.”


숫자가 구체적이다. 지나치게.


"그 숫자는 어떻게 산출된거죠?"


“그야 제가 해봤으니까요?”


기일은 속행된다.


“쌍방 대리인은 감정절차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일은 12월 23일입니다.”


-


“물고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요.” 가우재가 설명한다. “이 프로그램이 메모리 파편을 자동적으로 채취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맞춰보는 거예요. 직소퍼즐 같이 맞추는 거죠. 빈 공간이 생기면 기존의 알파 자료를 참고하여 동일성을 확인한 겁니다. 제일 유력한 건 알파 0.983 버전이니깐 아무래도 이걸 참고했죠.”


“그래, 기술적인 건 차치하고, 가 상무, 이런걸 만들라고 지시한 적이 없는데, 만든 이유가 뭐죠? 몽상의 리소스를 써가면서까지?” 정우령 회장이 노기를 억 누르며 묻는다.


“기술적 오류가 발생했으니 기술적 오류의 원인을 찾아 수정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CTO이니 기술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저에게 전적인 재량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김학주 사건 이후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CTO에게 몽상 시스템의 운영을 포함한 기술적 사항에 대한 전권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정우령 회장 본인이었다.


홍순기가 끼어든다: “근데 대체 왜 증언을 그런식으로 한 거예요, 지금 회사가 어떤 위기에 봉착했는지 몰라요?”


“제가 위증을 해야 했다는 건가요?” 가우재가 차갑게 반문한다.


“아니, 그건 아니지.” 정우령이 정리한다.


“…하지만  상무가 애초에 그런 중요한 프로그램, 그러니깐 ‘물고기 개발했을  나한테 보고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는 거지.  상무 잘못은 아닙니다. 그래서 알아 냈어요? 물고기라는  써서, 김민주양이  죽었는지, 김학주가  죽었는지?"

"거기까지는 확인 못했습니다. 그걸 알았다면 보고 드렸겠죠."

"그래, 그랬겠지." 정우령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시 생각한다. "홍순기 상무님, 강덕구 변호사가 핸들링을 잘못한 거예요.”

말을 끝낸 정우령이 홍순기를 빤히 쳐다본다.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회장님, 저한테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


“도토리묵은 먹었어요?”


각자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 홍순기가 가우재에게 묻는다.


“맛있던데요. 상무님 궁금하지 않으세요?” 가우재가 반문한다.


“도토리묵 맛이요?”


“알파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


“미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명예원은 와이퍼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때낸다.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다. 판사는 피곤한듯 오른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조용히 중얼거린다: “이런 미친새끼들….”


제9회 재판기일: 판사는 원고에게 감정절차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고인겸 변호사는 이 사건 핵심은 김민주의 사망이 알파OS의 설계상 오류에 의한 것인지 여부이기 때문에, 알파OS의 알고리즘 상에 법률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하자가 있는지 반드시 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판사는 메모 한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 없음”


판사는 피고에게 감정절차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강덕구 변호사의 자리는 김가연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불과 일주일전 서울에서 부부동반으로 함께 와인을 마신 로스쿨 동기. 김가연 변호사는, 이 소송은 무의미함을 강조한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김학모가 평판을 걱정하는 대기업에 겁을 줘서 돈 몇푼을 뜯어낼 목적에서 제기한 소송에 불과하고(사실이긴 했다), 실제로 김학모가 회사에 전화를하여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협상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알고싶다”등에 제보를 하겠다고 말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제출한다.


“김학모가 공갈의 수단으로 이러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신성한 법원과 재판부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피고 대리인에게 재판장이 석명하는 것은 ‘소송의 의미’가 아니라 ‘감정절차’에 대한 의견입니다.” 판사의 목소리는 서늘하다.


-


기일이 공전하고 있다. 쟁점이 흩어지고 있다. 지난 몇개월 동안 보아온 불필요한 드라마가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 사무실이 평소보다 서늘하다.


명예원 판사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감정신청서를 다시 한번 흝어본다.


그녀는 “법원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자”라고 기재된 부분에 두줄을 긋고, “법원이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자”라고 고쳐적는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그녀가 사건메모에 “당사자들에게 감정인으로 적당한 자를 추천하도록 해야함”이라고 적던 도중에 전화가 울린다: 영월지원장의 호출.


-


지원장실 창문에서는 법원 앞 오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거기에 남아있는 황량함도.


석응답 지원장은 명예원 판사를 지원장실 소파에 앉게한다: 50대 중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은색머리: 실내에서도 양복을 갖춰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다.


지원장실 주임이 따뜻한 유자차를 내놓는다: 겨울날에 어울리는 맛과 따뜻함.


석응답 지원장은 명예원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가 아직 로스쿨생이었을 시절 석응답 판사가 출강을 하여 민사법을 강의한 일, 제자였던 그녀가 자신의 배석판사로 함께 근무했던 일, 같은 재판부에서 일하면서 가끔 같이 교외로 나가곤 했다. 그 무렵 함께 근무했던 왕종기 판사는 지금은 변호사로 개업 했다. 물론 한참 이슈가 됐던 북한의 쿠테타 이야기도 잠깐 오간다. 석응답은 웃으면서 정말 북한이 붕괴하면 명예원 판사 기수의 단독판사들이 북한 여러 지방의 법원장으로 승진할지도 모르겠다는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리고 석응답 지원장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명예원 판사: 안그래도 방금전까지 사건기록을 읽고왔다. 사건의 쟁점은 결국 알파OS의 알고리즘에 결함이 있는지 여부. 로스쿨에 입학하기 전에는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한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설령 알파OS에 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50억원을 인정하기는 어렵지는 않겠는가: 명예원은 동료 판사에게도 사건에 대한 심증을 밝히기를 꺼리는 편이었지만 전에 모시던 부장이니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게 된다.


석응답 지원장: 자신이 듣기로는 원고 김학모나, 변호사인 고인겸 모두 문제가 많은 사람같다는 취지로 말을 잇는다.


명예원 판사: 사건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 가급적 보도를 보고있지는 않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도 원고나 대리인 모두 인격적으로는 훌륭한 사람 같지는 않다: 특히 고인겸 변호사가 작성한 것이 분명한 답변서를 고인겸 변호사가 다시 열심히 반박하는 모양새가 우습다는 평을 더한다.


석응답 지원장: 고인겸 변호사가 쌍방대리 금지에 저촉되는 것은 아닌지?


명예원 판사: 그 문제로 좀 알아보긴 하였는데, 원고 본인이 동의하기만 한다면 이슈는 없다.


어느새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기위해 명예원은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시도한다: "에이, 원장님 저도 그 정도는 알아봤죠.”


그녀는 웃으면서 말을 건네지만 입꼬리가 떨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녀는 눈치없는 사람은 아니다.


석응답 지원장: 웃지 않는다. 그는 눈을 아래로 깔고 잔속에 들어있는 유자찌꺼기를 티스푼으로 만지작거린다.


"이러한 사건을 오래 끄는 것은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논쟁거리만 만드는 것이니 조속히 마무리하는 것이 좋아요."


명예원 판사: 하지만 감정인을 정하고, 사고차량에 탑재된 OS를 복원시키고, 감정절차를 제대로 밟으려면 적어도 1년은 더 걸릴 것 같다. "다행히 제가 영월지원에 1년 더 근무하는 것으로 인사가 났으니 제가 사건 마무리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건 후임자한테 넘겨주면 욕먹잖아요."


석응답 지원장: “감정절차가 꼭 필요한가?”


명예원 판사: “반드시 필요합니다.”


석응답 지원장: 자율주행자동차 OS를 검증할 기관이 마땅치 않고, 그런 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감정기간이 지나치게 장기가 될 것이고, 엄청난 감정료가 들 것이 명백하다. 원고 패소로 끝날 사건에 거액의 감정료를 원고에게 부담시키면 법원이 신뢰를 잃을 수 있다.


명예원 판사: “제1심 법원의 의무는 사실관계의 확정이고, 이 사건의 사실관계는 감정절차를 통해서만 확정할 수 있습니다. 원고가 패소할지 승소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원고가 감정료를 규정대로 선납하겠다면 진행하는 게 원칙입니다.”


석응답 지원장: 고개를 앞으로 내밀면서 말한다: “명판, 김학모나 고인겸같은 쓰레기들이 승소를 하면 법원에 대한 국민여론이 악화될 것이 자명한데, 원고가 승소하면 안되지 않겠어?”


명예원 판사: “법원의 판결은 여론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통해 드러난 사실관계와 법률에 따라 결정됩니다.”


석응답 지원장: 털털하게 웃으면서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는다. 석응답 지원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한동안 명예원 판사를 가만히 쳐다본다.


명예원 판사: 창밖의 바람 소리가 들린다. 그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석응답 지원장: “내가 자네한테 감정절차를 진행하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나?”


명예원 판사: “사건의 재판장은 접니다. 저는 양심과 법률에 따라 재판을 진행하겠습니다.”


잔은 모두 비었고, 모든 말은 이미 오갔다. 석응답 지원장은 일어서 명예원 판사를 배웅한다.


“자네는 정말 훌륭한 판사네야”


명예원 판사는 자신의 사무실로 창문을 내다본다. 이규가 왔다. 피켓을 들고, 비장한 얼굴로 서있었다. "미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다시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다. 명예원 판사는 피곤한듯 오른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조용히 중얼거린다: “저런 미친새끼….”


-


간혹 욕을 입에 담긴했지만 명예원 판사는 품위 있는 엘리트로 정평난 사람이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졸업, 같은 대학 로스쿨 졸업, 재판연구원, 유명 로펌 소속변호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초임, 극히 이례적으로 4년차에 단독판사로 승진. 커리어로 본다면 어디 하나 흠잡을데 없이 완벽하다. 여기까지라면 그녀를 인간미 없는, 출세지향적인 인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가 출세한 것은 그녀가 똑똑했기 때문이지 그녀가 인간미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공부를 하면 좋은 성적이 나오고, 적당히 노력을 하면 커리어가 풀린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학우나 동료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적의없는 모습과, 우수한 성적이 주는 후광때문인지 그녀는 가는 곳마다 친한 친구 한둘은 꼭 만들곤 한다.


커리어 때문인지 그녀의 친구 중에 유독 법조인이 많은 편이다: 예를 들면 고양외고에서 단짝 친구들인 홍하나, 김지혜, 박은유, 같이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법조인이 된 정치하, 서울대 로스쿨에서 공부를 하였던 이정희, 김예정, 류지현, 재판연구원 동기 중에는 송차영, 김가연, 민혜주, 함께 변호사로 활동했던 이민지, 최경슬, 그리고 함께 배석판사로 일했던 왕종기 변호사.


제10회 변론기일 하루전에 제출된 피고의 위임장에는 이들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다. 제각각 다른 로펌에 속한 이들이 동창회라도 열었는지 모두 모인 것이다: 변론기일은 이들이 모두가 참석한 것은 물론이다: 이제까지 사건을 주도해온 강덕구 변호사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녀의 친구들이 모두 출석했다. 가장 친한 김가연, 이정희가 피고석에 앉는다. 의자가 부족해서 상당수는 방청석에 앉아야 했다. 명예원 판사는 출석을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나간다. 기묘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좁은 법정에 울린다.


판사는 원고에게 감정절차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원고 대리인 고인겸 변호사: 같은 소리. 같은 소리.


피고 대리인 김가연 변호사: 명예원 제지시킬 때까지 김학모에 대한 인신공격이 계속된다.


“피고 대리인, 감정절차에 대한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 판사의 목소리에 피곤함과 노기가 묻어있다.


피고 대리인 이정희 변호사: 자율주행OS의 알고리즘에 대한 감증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 일인지. 명예원이 익히 보아왔던 평소 습관처럼, “첫째, 둘째, 셋째”라고 말하면서 허공에 손가락으로 아라비아 숫자를 그린다: 첫째, 아직 자율주행OS의 기술과 ‘계율’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것이 안전한 설계인지 판별할 기준이 모호하다. 둘째, 자율주행OS 기술은 피고의 핵심적인 영업비밀에 해당하는데, 감정절차에서 그 핵심기술이 노출되면 회사는 물론이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셋째, 둘째에서 강조한 유출위험 없이 공정하게 감정절차를 시행할 기관이나 전문가를 찾을 수 없다.


첫째, 둘째: “자율주행OS의 설계상의 안전”은 어차피 윤리적, 법적인, 가치적 판단이 들어가야 하는 문제다. 그래서 그 판단은 결국 법원이 (그것이 옮든 그르든) 어떻게든 내려야 하는 부분이다.


셋째가 중요하다: 감정을 한다면, 누가?


세계 최초로 시도하고 있는 자율주행 OS에 대한 감정을 누가? 유사업종의 업체? 모두 경쟁사다. 경쟁사를 감정인으로 채택하는 것은 이래저래 말이 나올만한 선택이다. 판사도 그 딜레마를 모르는건 아니다.


감정절차를 진행한다면: 그게 그녀가 믿는 법원의 의무라면: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누가? 진행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실무적으로 어떻게? 어떤 설비가 필요한가? 그 정확성은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실무적인 난관들, 법적인 난관들.


하지만 피고가 원하는 것은 감정절차를 아예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건 다른 얘기지.


“원고의 감정신청을 기각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판사의 친구들은 시위하듯 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이게 재료다. 판결의 재료. 이 목소리들: 명예원 판사는 표정에 대한 통제를 잃어가는 걸 느낀다: 그리고 남은 것은 소송이다: 기일 속행.


재판장이 퇴정하자 그들은 일제히 그녀의 등에 90도로 몸을 꺾어 인사를 올린다. 하지만 그건 변호사가 법대에 보이는 존중의 제스쳐가 아니다.


석응답 지원장이 다시 그녀를 호출한다.


석응답 지원장: "명판사, 사건을 다른 판사에게 재배당할 생각은 없어? 친구들이 피고쪽 변호사쪽으로 붙었는데 공정한 재판이 가능하겠어요?"


판사들 사이에서는 재판장과 친분이 있는 변호사가 선임되면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 사건을 다른 판사에게 재배당한 관례가 있다. 하지만 이번엔 앞뒤가 바뀐 것이다.


“저는 양심과 법률에 따라 재판 하겠습니다.”



-


늦은 저녁 퇴근길. 명예원은 관사 현관에 편지 봉투가 하나가 붙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차갑고 어두운 밤.


“명판결을 내리시는 명판사님에게”


편지봉투의 겉면에는 인쇄된 글귀.


편지봉투 안에는 수표가 한장 들어있었다. 그녀는 핸드폰 불빛으로 자기앞수표에 적힌 숫자를 비췄다.


3,000,000,000원.


30억원.


판사는 생각보다 박봉인 직업이다. 한달급여는 500만원. 그녀는 그렇게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다. 아버지는 중식당을 한다: 편지봉투에는 수표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바람 소리가 들린다. 법원 뒷마당에 세워진 단독판사용 관사. 주위를 둘러본다: 현관앞 조명을 빼면 어둠 뿐이다.


끝없는 어둠과 고독 뿐이다.


편지봉투에 적힌 글귀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자기앞수표. 유난히 추운날씨다: 그걸 주머니에 넣는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도, 그걸 알 사람도 없겠지. 그건 이걸 건낸 사람과 그녀만의 영원한 비밀이 될 것이다. 추적할 수 없이, 보이지 않는 거래. 그리고 이 작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자기앞수표를 8조각으로 찢는다. 그걸 다시 봉투안에 담는다: 다시 제자리에 붙여놓는다.


사무실은 멀지 않다. 그녀는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가 감정명령문을 써내려 간다: 영감이 들어차는 순간이 있다. 명령문을 완성할 때쯤 시계는 새벽 3:34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제 감정인을 결정하는 문제만 남아 있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이긴 했다:


그때 그녀의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벨 소리는 유명가수 손시정의 노래 “헛바퀴”. 그녀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


가수 손시정이 회사의 수석연구원으로 일했던 것은 대중에 익히 알려진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녀는 감정인 이름에 “손시정”이라고 적어 놓는다: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다. 현업에서 일하지 않는 퇴직자 말고는 대안이 없다. 그리고 슈퍼스타 손시정 말고 이 돈되는 업계에서 퇴직자를 어디서 찾겠는가? 이 양반이 감정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건 그때가서 결정 하기로 하자.


전화벨이 다시 신경질적으로 울려댄다: '헛바퀴'의 멜로디가 불길하다.


판사는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다가 머그잔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판사는 왼손으로 핸드폰을 고정하고, 떨리는 오른손으로 '통화' 버튼을 터치한다. 그녀는 핸드폰을 서서히 귓가에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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